시사

농장 게임으로 8천만 달러 꿀꺽?! 터키판 “조희팔” 사건

OUTNUMBERED 2025. 2. 6. 07:56

"치플릭 뱅크" 게임의 타이틀 화면.
"치플릭 뱅크" 게임의 타이틀 화면.

 

 

2016년 7월 31일, 터키 앱 스토어에 ‘치플릭 뱅크(Ciftlik Bank)’라는 완전히 새로운 게임이 출시된다. 이 게임은 간단히 말해 가상의 농장을 꾸리고 투자하는 방식이다. 소, 닭, 염소 같은 가축을 키우는 ‘농장 게임’이야 흔히 있는 장르지만, 치플릭 뱅크는 그저 가상 게임에 그치지 않는다. 앱에서 ‘가상 가축’에 투자하면 실제로 존재하는 ‘진짜’ 농장에 자금이 투입되고, 그 농장에서 나온 달걀이나 우유 같은 진짜 생산물은 근처 오프라인 직영 매장에 납품되어 판매된다. 결국 게임을 하면서 농민도 지원하고 실제 돈도 벌 수 있다는 이야기다. 너무 그럴듯해 보인다. 그 앱의 개발자는 언뜻 보기엔 순진해 보이는 젊은 남자다. 하지만 그는 이 게임을 통해 터키 전역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속여 막대한 돈을 갈취했고, 8천만 달러 (한화로 약 1052억원) 이상을 챙겨 사라졌다. 지금 그는 어디에 있고, 이 믿기 어려운 사기를 어떻게 저질렀을까? 이 글을 통해 깊이 파헤쳐본다.

 

보잘것없는 출발: 거대한 사기의 서막

"메흐멧 아이든" 의 어린시절
"메흐멧 아이든" 의 어린시절

 

 

메흐멧 아이든(Mehmet Aydin)은 터키 북서부의 대도시 부르사(Bursa)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않아 십대 때 학교를 그만두고 식당에서 웨이터와 설거지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의 꿈은 유명 래퍼가 되는 것이었지만,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그래도 터키 랩 신에서 몇몇 인맥을 쌓았고, 그때 온라인 게임 디자이너 한 사람을 만났다. 아이든은 페이스북 게임 ‘팜빌(FarmVille)’의 광팬이었다. 2016년, 그는 새로 사귄 게임 디자이너 친구와 함께 지하방에서 ‘팜빌’과 비슷한 게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치플릭 뱅크(Ciftlik Bank)’다. 터키어로 ‘농장 은행’이라는 뜻이다. 이 게임은 출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불과 8개월 만에 5만 명이 넘는 플레이어들을 모았다.

 

유명한 래퍼가 꿈이였었던 "메흐멧 아이든"

 

치플릭 뱅크: 믿기 어려운 농장 투자 게임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 사기꾼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렇게 순박하게 생긴 청년이 사기꾼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게임의 구조는 단순하다. 플레이어는 농장을 시작하고 직접 운영한다. 금화(gold)라는 게임 내 화폐를 이용해 닭, 염소, 소, 벌 같은 가축을 사들이고, 그들이 생산하는 달걀, 우유, 벌꿀 등을 팔아 현금을 번다. 그 수익으로 더 많은 가축을 사들이며 농장을 키우는 식이다. 여기에 현실의 돈을 내고 게임 내 금화를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게임이 단순한 ‘페이 투 윈(Pay-to-Win)’ 모델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 컸다. 게임 내에서 충분한 가상 수익을 올리면, 그 금화를 다시 실제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아이든은 한발 더 나아갔다. 바로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넣는 돈을 실제 축산 사업에 투자하고, 그 실제 농장에서 얻은 수익을 게임 플레이어에게 돌려주겠다는 발상이었다. 즉, 게임과 터키 농업에 대한 크라우드펀딩을 결합한 형태였다. 당시 터키 농업은 여러 이유로 점점 침체하고 있었고, 많은 농축산물을 수입에 의존해야 했다. 이때 치플릭 뱅크는 직접 투자로 국내 농업을 살릴 수 있다는 ‘획기적인’ 비전을 내놓았고, 사람들은 혹했다. 하지만 너무 좋아 보이는 이야기는 종종 함정이 있다.

 

온 나라를 속인 치플릭 뱅크: 그 이면의 거짓

"치플릭 뱅크" 게임 플레이 화면
"치플릭 뱅크" 게임 플레이 화면

 

 

2017년 초, 아이든은 고향 근처에 첫 번째 실제 농장 두 곳을 세운다. 성대한 개장식을 열었고, 지역 군수와 시장까지 참석했다. 그는 이 행사에서 완전히 ‘스타’ 대접을 받았다. 경호원들이 몰려드는 팬들을 떼어낼 정도였다. 게다가 아이든은 터키의 유명 배우 메흐멧 제빅(Mehmet Cevik)의 지지까지 받았다. 제빅은 회사의 홍보 컨설턴트 역할을 맡으며 대중의 신뢰를 끌어올렸다. 1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치플릭 뱅크 직영 매장이 터키 전역에 100곳이 넘게 생겼다. 그 매장들에선 치플릭 뱅크 로고가 찍힌 치즈, 벌꿀, 소시지 등을 판매했는데, 사실 이 제품들은 게임 회사가 직접 기른 가축이나 양봉장에서 온 게 아니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게임에서 5% 정도의 이익금을 받고, 이 매장 제품을 살 수 있는 상품권도 받았다. 게임 안에서 구매한 제품을 현실 매장에서 찾아갈 수도 있었다. 나머지 이익금은 현금으로 지급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어떤 플레이어가 약 4,200달러 정도를 내고 가상 벌통 3개를 샀다고 치자. 그럼 매달 840달러씩 수익이 쌓여 1년이면 총 5,800달러 이상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고 홍보했다. 게임의 전성기에는 플레이어 수가 50만 명을 넘었고, 실제 돈을 투자한 사람만 13만 명이 넘었다. 일부는 대출까지 받아 투자했고, 총 투자액은 2억 5천만 달러( 한화로 약 3500억원 )에 달했다.

 

"치플릭 뱅크"의 홍보 컨설턴트를 맡았던 터키의 국민배우 "메흐멧 제빅"
"치플릭 뱅크"의 홍보 컨설턴트를 맡았던 터키의 국민배우 "메흐멧 제빅"

 

사기 폭로

 

2017년 말, 게임 출시 후 불과 1년 반 만에 곳곳에서 잡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SNS에서 투자자들은 약속했던 수익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고 항의했다. 터키 당국도 치플릭 뱅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특히 회사의 은행 계좌가 북키프로스(북부 키프로스)에 있는 페이퍼컴퍼니 명의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의혹이 짙어졌다. 결국 터키 관세.무역부도 회사 재정 상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때 아이든은 사기가 들통날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한다.

 

메흐멧 아이든, 국외로 도주하다

 

2017년 12월, 아이든은 갑자기 회사 지분을 전부 매각한다. 다음 달엔 치플릭 뱅크가 신규 가입자 유치를 중단한다고 발표했고, 이익금 지급도 멈췄다. 은행들이 치플릭 뱅크와 거래를 거부하고, 쏟아지는 민원에 당국이 압박을 가하자 더는 버틸 수 없었던 모양이다. 분노한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돌려달라고 아우성쳤다. 어떤 사람들은 전 재산을 넣었고, 나라를 살린다는 애국심까지 내세운 투자도 많았다.

 

긴 도피의 끝

 

결국 체포된 메흐멧 아이든.
결국 체포된 메흐멧 아이든.

 

 

2020년 1월, 민간 조사관들은 아이든이 브라질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그로부터 1년 반쯤 뒤, 아이든은 결국 상파울루 주재 터키 영사관에 자진 출두한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이틀 뒤 터키로 송환됐다. 이스탄불 공항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몰려들었고, 그는 곧바로 법정에 섰다. 현재 메흐멧 아이든과 그의 공범들은 엄청난 형량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 아이든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총 징역 8만 9천 년이 넘는 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그의 페라리와 요트는 이미 우루과이 당국에 의해 압수됐다. 도망칠 때 850만 달러(약 3억2200만 리라)에 달하는 현금을 갖고 나갔던 그가, 체포될 당시 소지금은 고작 13달러였다. 불과 몇 년 만에 터키 전역에서 수억 달러를 갈취해 간 이 ‘착해 보이는 청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게임을 하면서 나라 농업을 살리고, 그 과정에서 부수입도 얻는다는 제안은 달콤했다. 수많은 사람이 별다른 의문 없이 이 모델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너무 좋은 건 늘 함정" 이라는 진리가 다시 한번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