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라스푸틴을 죽였는가?
한국 현대 정치사에는 권력의 이면에 숨어 국정에 영향을 미친 인물들이 적지 않다. 박근혜 정부 당시 '비선 실세'로 불리며 탄핵 사태의 도화선이 된 최순실, 그리고 최근 불법 계엄령 논란 끝에 탄핵된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무속인 ‘천공’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적인 권한 없이 권력 핵심에 접근해 영향력을 행사하며, 대중의 분노와 관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오래전 먼 러시아에서도 있었다. 바로 그리고리 라스푸틴(Grigori Rasputin), 러시아판 ‘비선 실세’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19세기 말,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20세기 초 황제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의 총애를 받으며 궁정에 발을 들였다. 신비로운 치유 능력과 예지력으로 황실의 절대적 신임을 얻은 그는 제국의 권력 중심부로 떠올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지나치게 방탕한 사생활과 황제의 신임을 앞세워 국정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은 귀족 사회는 물론 종교계와 대중의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를 경멸하는 이들은 점점 늘어났고, 마침내 라스푸틴은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1916년 12월 29일 아침, 라스푸틴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딸 마리아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그는 하루 종일 기분이 어두웠고 예민해 있었다. 밤 11시 무렵, 그는 잠자리에 드는 딸에게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다.
“먼저 자고 있어라. 궁에 좀 다녀오겠다.”
그것이 그녀가 들은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틀 뒤인 12월 31일, 수색대는 얼어붙은 말라야 네프카 강의 얼음 밑에서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한쪽 눈은 도려져 있었고, 몸 전체는 세 발의 총탄과 무수한 타박 흔적으로 뒤덮여 있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악명 높던 사내는 마흔일곱의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설의 서막이었다.
라스푸틴은 간신의 대명사, 괴승, 미친 수도사 등 수많은 별명과 함께, 시대를 초월해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그의 기이하고도 기묘한 삶과 죽음은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이야기는 영화, 소설, 오페라, 심지어 음악 (1978년, 유로팝 그룹 보니 엠(Boney M)의 히트곡 <Rasputin>) 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결정적인 의문 하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1916년 12월 30일 새벽, 유수포프 궁 안에서 과연 라스푸틴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라스푸틴의 생애
그리고리 라스푸틴은 1869년, 시베리아 튜멘 주의 작은 마을 포크롭스코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는 학교에 다니긴 했지만 학업 성적은 형편없었고, 성인이 되어서도 사실상 문맹에 가까웠다. 부모 예핌과 안나 사이에는 여러 자녀가 있었지만 대부분 유아기에 사망했으며, 살아남은 건 라스푸틴 한 명뿐이었다고 전해진다.
1887년, 라스푸틴은 프라스코비야 두브로비나와 결혼해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장성한 자녀는 드미트리, 마리야, 바르바라 세 명뿐이었다. 가족을 꾸린 그는 1897년경, 수도승의 삶을 자처하며 가정을 떠나 러시아 전역을 순례하기 시작한다. 그는 성지 순례자로서 아토스 산(그리스), 카파도키아(오스만 제국), 예루살렘 등을 돌며 많은 스승을 만나고, 영적 체험을 하였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가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받은 적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그는 기존 교회 제도에서 벗어난 신비주의적 설교를 펼쳤고, 러시아 내에서 이단으로 간주되던 일부 종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당시 러시아에서 이단 종파로 간주되던 흘리스트파(Khlysty)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마지막 차르"에서도 이 내용을 언급하며, 흘리스트파는 "죄를 짓고 그 죄를 회개함으로써 구원에 이른다"는 독특한 교리를 지닌 종파였다. 이들은 의도적으로 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구원의 과정으로 여겼고, 집단 성행위나 자해와 같은 극단적인 의식을 치렀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심지어 일부 증언에 따르면 그들의 종교적 의식이 처녀의 가슴을 절단하는 행위로 마무리되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처럼 극단적이고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흘리스트파는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종파의 특성이 원래 방탕과 쾌락을 일삼던 라스푸틴의 성향과 맞아떨어졌고, 그가 이를 영적 체험의 일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들은 당시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이 많았으며, 흘리스트파가 실제로 그런 행위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결국 라스푸틴의 초기 생애는, 영적인 갈망과 현실 속 방황이 뒤섞인 시간이었다. 훗날 그를 향한 찬사와 혐오, 경외와 두려움은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된 신비주의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권력의 중심에 서다
라스푸틴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부터였다. 그는 강신술과 신지학 등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적 사상과, 특유의 카리스마를 앞세워, 각 지방은 물론 귀족 사회에서까지 빠르게 주목받았다.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 사교계의 귀부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중에는 훗날 황후 알렉산드라에게 그를 소개한 안나 비루보바 부인, 밀리차 대공비, 아나스타시야 대공비 등 황족 여성들도 포함돼 있었다. 1905년 11월, 비루보바의 주선으로 라스푸틴은 마침내 차르 부부와 첫 대면하게 된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를 "신이 보낸 사람이자 구원의 사자"로 여겼고, 깊은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이후 황태자 알렉세이의 혈우병 발작이 심해지자, 황후는 기존의 치료를 포기하고 라스푸틴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다.
혈우병은 혈액 응고에 필요한 단백질이 결핍되어, 작은 상처나 타박상에도 출혈이 멈추지 않는 유전성 질환이다. 당시에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어, 생명을 위협하는 병으로 여겨졌다. 오늘날에는 부족한 응고 인자를 정맥 주사로 주기적으로 보충함으로써 비교적 안정적인 관리가 가능하지만, 당시로서는 사실상 ‘불치’에 가까운 병이었다.
당시 의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손을 놓은 상황에서, 라스푸틴이 내놓은 방법은 특별한 치료라기보다는 정서적 안정과 휴식에 가까웠다. 그는 황태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며 불안을 진정시켰고, 놀랍게도 출혈은 점차 멈춰가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알렉세이의 증상이 재발할 때마다, 라스푸틴이 기도를 올린 직후 상태가 호전되는 일이 반복되자,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를 황실에서 결코 떼어놓을 수 없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일각에서는 이 회복이 우연 혹은 기존 약물 치료의 중단으로 인한 반사 효과였다고 본다. 당시 주치의들이 황태자에게 처방하던 아스피린은 출혈을 악화시킬 수 있는 약물이었으며, 라스푸틴의 개입으로 약 복용이 중단되면서 자연스럽게 상태가 호전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러나 당시 왕실, 특히 아들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던 알렉산드라 황후에게는 이런 과학적 설명이 중요하지 않았다. 라스푸틴은 그녀에게 기적을 실현한 존재였고, 차르 부부는 더욱 더 그를 신뢰하기 시작한다.
이후 라스푸틴은 궁정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사실상 황제의 비공식 측근으로 여겨졌다. 그는 점차 종교, 외교, 내정 전반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고, 고위 관료 인사에 개입해 자신의 뜻을 따르는 인물을 요직에 앉히기도 했다. 말 그대로 공식 직책 없이 권력을 휘두르는 비선 실세로 떠오른 것이다. 그의 영향력은 아첨에 따라 좌우되었고, 반대한 자는 좌천되거나 축출되었다. 당시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은 실력 있는 인물로 평가받았지만 혁명주의자에게 암살당했고, 그 후임인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라스푸틴을 축출하자고 건의하자 되레 정계에서 퇴출당하는 등, 라스푸틴은 누구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차르 니콜라이 2세는 애초부터 정치적 감각이 부족한 인물이었다. 즉위 당시 스스로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고 고백할 만큼 불안정했고, 국가의 중대사조차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매제에게 조언을 구할 정도로 주변 사람의 판단에 지나치게 의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아내 알렉산드라 황후 역시 사교성이나 권력 운영 능력이 부족했고, 러시아 귀족 사회에 끝내 적응하지 못한 채 고립된 생활을 이어갔다. 연애결혼 끝에 어렵게 얻은 아들 알렉세이가 불치병에 걸리자, 황후는 그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취약함은 곧 라스푸틴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집착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같은 배경 속에서, 라스푸틴은 차르 부부 앞에서는 성자처럼 굴었지만, 뒤에서는 귀부인들에게 성적 접근을 서슴지 않았고, 방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일삼았다. 그의 추문은 황족과 귀족들 사이에 공분을 일으켰으며,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인척들—덴마크 출신 황태후 다우마, 황제의 여동생 올가, 황후의 언니 옐리자베타 대공비—까지 나서서 “라스푸틴을 멀리하라”고 충고했지만, 황후는 어떤 간언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스푸틴은 황태자뿐 아니라 황녀들과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가 잠옷 차림의 공주들이 있는 방에 드나들었다는 증언이 있으며, 공주들 앞에서는 언제나 경건하고 자상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진다. 황녀들 역시 그를 ‘남동생을 살려준 자상한 할아버지’로 여겼고, 그가 사망한 뒤에도 그의 사진을 부적처럼 품고 다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윽고 무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라스푸틴이 황후와 불륜 관계에 있으며, 황자 알렉세이의 생부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심지어 차르 니콜라이 2세를 꼭두각시처럼 조종하고 있다는 소문은 러시아 전역에 퍼져나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시기, 차르가 전선으로 떠나자 궁정에는 더 이상 그를 견제할 사람이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인지하기 시작했다. 지금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이는 황제가 아니라 라스푸틴이라는 사실을.
라스푸틴의 암살
“라스푸틴을 죽여야 했다.”
그렇게 단언한 이는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사촌,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이었다. 그는 훗날 자신이 암살을 주도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1927년 프랑스 망명 중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회고록 『라스푸틴』을 출간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모든 것은 1916년 12월 30일 새벽 1시경, 라스푸틴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이카 궁으로 초대한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모이카 궁의 위층에서는 이미 네 명의 공범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은 유수포프 공작과 함께 이 암살 계획에 가담한 인물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다.
-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 (Prince Felix Yusupov):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유수포프 가문의 후계자이다. 그는 라스푸틴을 암살한 주도자로, 자신의 저택인 모이카 궁전에서 암살을 실행한다.
-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Dmitri Pavlovich):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사촌으로, 황실 일원이다. 그는 유수포프와 함께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했으며, 이후 이 사건으로 인해 페르시아 전선으로 유배되었다.
- 블라디미르 푸리시케비치 (Vladimir Purishkevich): 극우 성향의 정치인으로, 라스푸틴의 영향력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암살 당일 라스푸틴에게 총격을 가한 인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 스탄이스와프 드 라조베르트 박사 (Dr. Stanislaus de Lazovert): 의사이며, 암살 계획에서 라스푸틴에게 제공된 케이크와 와인에 독을 넣는 역할을 맡았다.
-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수호틴 (Lieutenant Sergei Mikhailovich Sukhotin): 육군 장교로, 암살 후 라스푸틴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그의 외투와 모자를 착용하고 라스푸틴의 집으로 향하는 연극을 벌였다.
이들은 축음기를 틀어 ‘양키 두들 댄디’를 들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유수포프는 아내가 친구들과 모임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소음을 둘러댔고, 라스푸틴을 지하실로 데려갔다. 한편 지하실에서는 암살을 위한 계획이 조용히 실행에 옮겨지고 있었다. 유수포프는 마데이라 와인 한 병과 케이크 몇 접시를 내놨다. 겉보기엔 별다를 것 없는 이 음식들에는 라조베르트 박사가 투입한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라스푸틴은 아무렇지 않게 케이크를 먹고 와인을 세 잔이나 마셨다. 유수포프는 조용히 그를 지켜보며 죽음을 기다렸다. 몇 초면 충분할 거라 생각했지만, 독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청산가리가 전혀 듣지 않자, 초조해진 유수포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를 떴다. 잠시 후, 그는 다른 방에서 권총을 들고 돌아와 라스푸틴의 등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렸고, 라스푸틴은 바닥에 쓰러졌다. 유수포프 일행은 그가 살아서 저택을 떠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공범 중 한명인 육군 장교 세르게이 수호틴에게 라스푸틴의 외투와 모자를 입히고 차를 몰아 나가게 했다. 그 시각, 저택 안에는 유수포프와 푸리셰케비치, 그리고 아직 숨이 붙어 있던 라스푸틴만 남아 있었다.그러나 그 순간,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유수포프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쓰러진 라스푸틴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려 다가갔다. 목을 만져 맥을 재려는 바로 그 순간 라스푸틴의 눈이 번쩍 떠올랐다. 그는 갑자기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유수포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수포프는 1953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당시를 이렇게 기록했다.
“그가 죽음을 거부하는 모습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공포와 광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직감했다. 라스푸틴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악마.. 아니 사탄 그 자체였다.”
유수포프의 증언에 따르면, 라스푸틴은 비틀거리며 지하실을 빠져나와 눈밭 위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를 뒤쫓아간 푸리셰케비치가 네 발의 총탄을 더 쏜 끝에야, 그는 마침내 눈더미 위에 쓰러졌다. 유수포프는 충격으로 기절해 침대에 눕혀졌고, 공범들이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라스푸틴의 시신을 밧줄로 묶고 모피코트에 싸 자루에 넣은 뒤, 페트롭스키 대교 위에서 강물 속으로 던졌다. 이 다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리틀 네브카 강(Little Nevka River)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유수포프는 훗날 이 모든 과정이 “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첫걸음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스푸틴이 죽음조차 거부한 존재로 그려진 것은 유수포프의 이야기만으로는 아니었다. 그의 딸 마리아 라스푸틴은 물론, 영국 외교관 출신 작가 마이클 존스턴(Michael Johnstone)과 라스푸틴 전기를 집필한 에드워드 라즈노프스키(Edvard Radzinsky) 같은 일부 저자들도 여기에 한층 기묘한 해석을 덧붙였다. 라스푸틴의 시신이 발견됐을 당시, 그의 손은 묶여 있지 않았고, 팔은 머리 위로 올라간 상태였다. 마리아는 자신의 회고록 『나의 아버지』에서, 이것이 아버지가 강물 속에서 부상에도 불구하고 의식을 되찾아 스스로 결박을 풀고, 마지막 순간 십자 성호를 그으며 숨졌다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유수포프의 증언과 마리아의 해석은 의도도 배경도 달랐지만, 묘하게 맞물리며 하나의 인식을 만들어냈다.
“라스푸틴은 죽일 수 없는 사내였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여러모로 허점이 존재한다. 1917년에 실시된 공식 부검 결과, 라스푸틴은 익사가 아닌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폐에서는 물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이는 그가 강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숨졌음을 의미한다. (부검 기록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존재하지만, 역사학자 더글러스 스미스가 저서 『라스푸틴』에서 인용한 문헌에 따르면, 라스푸틴의 폐는 ‘완전히 마른 상태였으며’, 익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마리아가 왜 아버지의 죽음을 극적으로 꾸몄는가에 대해서는 의외로 간단한 답이 있다. 그의 전설은 곧 그녀의 생계였다. 라스푸틴이 죽음 앞에서도 신성한 존재처럼 비춰질수록, 그의 딸인 자신 역시 ‘성인의 후계자’로 기억될 수 있었다. 실제로 현재 러시아 정교회의 일부 분파는 그를 순교자로 추앙하고 있다. 그리고 유수포프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거짓을 말할 이유가 분명했다. 그의 진술 역시 단순한 왜곡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일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
유수포프가 자신의 회고록을 처음 출간했을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망명 중인 난민의 신분이었다. ‘라스푸틴을 죽인 남자’라는 명성은 그가 가진 몇 안 되는 자산 중 하나였고, 수익성 또한 뛰어나서 그는 이 이미지를 집요하게 지켜내려 했다. 1932년, 미국에 머물던 유수포프는 영화사 MGM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한다. 문제의 영화는 "라스푸틴과 황후". 영화 속에서 라스푸틴이 황족 여성을 조종해 성폭행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이 유수포프의 아내이자 황제의 조카였던 이리나 공주를 떠올리게 만든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법원은 유수포프 부부의 손을 들어주었고, MGM은 거액의 손해배상을 지급해야 했다.
이 소송은 단순히 개인의 명예를 지킨 데서 그치지 않았다. 법원은 “영화가 허구임을 사전에 고지했다면 책임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판결했고,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거의 모든 영화의 엔딩에 ‘이 작품은 허구이며, 실제 인물이나 사건과의 유사성은 순전히 우연의 일치입니다’라는 문구를 넣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라스푸틴은 죽었지만, 그의 이름은 미국 영화사에 법적 유산을 남긴 셈이었다.
하지만 이 법적 승리는 곧 진실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유수포프는 후에 출간한 회고록에서, 라스푸틴에게 치명상을 입힌 인물은 자신이 아니라 블라디미르 푸리셰케비치였다고 인정했다. 푸리셰케비치의 기록 역시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결국 유수포프가 ‘라스푸틴을 죽인 남자’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 자신이 꾸며낸 서사에 가까웠다.
그의 서술을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유수포프는 자신을 선과 악이 대결하는 극적인 서사의 주인공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1927년에 출간한 초판과, 1953년 출간된 회고록 『잃어버린 영광』을 비교해보면, 라스푸틴은 단순히 ‘악마에 비유되는 인물’에서 실제로 성경 속의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격상된다. 라스푸틴이 총을 맞고도 다시 살아나 유수포프를 덮쳤다는 ‘부활’ 장면조차 의도적으로 구성된 허구의 일부로 보이며, 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1847년 소설 『여주인』에서 서사적 요소를 차용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여주인』은 주인공이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점차 정신적으로 잠식당하며 현실 감각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유수포프가 라스푸틴에게 느낀 두려움과 혼란, 그리고 집착이 허구적 이미지로 재구성되는 데 이 소설의 서사가 일정 부분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유수포프는 라스푸틴을 괴물로 묘사함으로써, 자신이 무장하지 않은 손님을 냉혹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을 덮으려 했다. 이 같은 서술이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지만, 일부 작가들은 그것이 단순한 자기 위안이 아니라 살인의 진짜 동기를 감추기 위한 ‘연막’이었다고 본다. 논리는 명확하다. 만약 유수포프가 주장한 것처럼, 라스푸틴을 제거한 이유가 러시아를 구하기 위한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면, 왜 그는 사건 직후부터 수사관들과 황후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실제로 유수포프는 사건 당일 밤 궁전에서 총성이 들렸다는 신고가 접수되자, 수사관들에게 “개 한 마리를 쐈다”고 진술했다. 그는 이 핑계를 통해 현장에 남은 총탄 자국과 혈흔을 설명하려 했다. 황후 알렉산드라에게도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했고, 라스푸틴이 평소처럼 저택을 나섰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곧 라스푸틴이 실종되고 시신이 발견되자, 그제야 수면 아래 있던 의혹들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초기 대응에서 유수포프는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이는 그의 진술과 동기를 더욱 의심받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영국 개입설
라스푸틴의 시신이 발견된 며칠 뒤, 러시아 일간지 『러시아 월드』는 “영국 탐정들의 이야기”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보도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영국 정보요원들이 라스푸틴의 황실에 대한 영향력을 우려해, 그를 비밀리에 제거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는 대중 사이에서 순식간에 퍼졌고, 당시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정 불안으로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던 만큼, 반향은 더욱 거셌다.
심지어 차르 니콜라이 2세 역시 이를 단순한 음모론으로 치부하지 못했다. 그는 즉시 영국 대사 조지 뷰캐넌 경과의 면담을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암살 공모자로 의심되는 인물의 실명을 직접 거론했다. 그 이름은 오스왈드 레이너—영국 외무부 산하 비밀정보국(MI6)의 전직 장교로, 당시에도 여전히 러시아에 체류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암살 주도자로 지목된 펠릭스 유수포프와 옥스퍼드 유학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 사이였다.
차르에게 제출된 기밀 보고서들 역시 오스왈드 레이너를 ‘여섯 번째 공모자’로 지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 뷰캐넌 대사는 영국 정부의 개입을 완강히 부인했고, 그의 해명은 니콜라이 2세에게 일정 부분 신뢰를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차르는 이 문제를 더는 언급하지 않았으며, ‘영국 요원 개입설’은 점차 명확한 증거 없이 떠도는 음모론으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인물 관계와 정황을 고려하면 이 의혹은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영국 탐정들의 이야기』가 보도된 바로 그날, 러시아에 주재 중이던 한 영국 요원이 본국에 편지를 보냈다. 훗날 MI6(영국 비밀정보국)로 알려지게 될 상부 기관에 이 보도의 진위를 확인해달라며, 해당 사건과 관련된 정보 요원들의 명단을 요청한 것이다. MI6는 해외에서의 정보 수집 및 첩보 활동을 담당하는 영국의 대외 정보기관으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 조직되었다가 1916년 이후 본격적인 체계를 갖추게 된다.
영국의 개입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주 인용하는 또 다른 근거는 라스푸틴의 시신에서 발견된 총상이 영국군의 표준 무기였던 웨블리 리볼버(Webley revolver)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웨블리는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장교들이 널리 사용하던 권총이었다. 하지만 이 주장 역시 분명하지 않다. 당시 부검 결과에서는 사용된 총기를 특정할 수 없었고, 시신의 화약 흔적을 기록한 사진들 역시 화질이 흐려 총구 흔적이나 화약 자국으로 총기 종류를 확정하기엔 불충분했다.
또 하나 자주 회자되는 자료는 1917년 1월 7일자 편지다. 진위가 명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페트로그라드 주재 영국 장교 스티븐 앨리(Stephen Alley) 대위가 본국에 있는 또 다른 장교에게 보낸 것으로 전해진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어둠의 세력’이 제거된 데 대해 대중의 반응도 좋다.”
편지 말미에는 오스왈드 레이너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며, 그가 “마무리 작업을 처리하고 있다”는 문장이 추가되어 있다. 레이너는 실제로 라스푸틴 암살 당시, 모이카 거리 92번지의 한 건물에 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고, 유수포프와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가 살해 계획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정황이다. 그러나 1916년 12월 24일 자의 공식 정보국 문서에는 레이너가 ‘활동 중인 요원’으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암살이 벌어진 모이카 궁에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며,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유수포프와 오랜 우정을 나눈 친구였다는 사실뿐이다.
하지만 영국의 개입 가능성을 반박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오히려 상트페테르부르크 경찰서장의 한 마디일지도 모른다. 그는 사건을 수사한 후, “내가 겪은 어떤 사건보다도 이 암살은 허술하고 어처구니없었다.” 고 평가했다. 만약 영국 정부가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면, 이렇게 서투르고 엉성한 실행이 가능했을까? 이 반문은 결국, 진실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라스푸틴 암살을 둘러싼 수많은 미스터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 초자연적 현상이나 영국정부의 밀정 활동보다 오히려 주동자들의 ‘무능함’이 많은 의문에 답이 될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라스푸틴의 시신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범인들은 자루에 무게를 달아주는 것을 잊었다. 역사학자 더글러스 스미스가 지적했듯, 라스푸틴의 시신을 싸고 있던 모피 코트는 천연의 부력 장치처럼 작용해, 시체가 강 바닥으로 가라앉는 대신 얼어붙은 수면 아래에 갇히게 만들었다.1917년 실시된 부검에 따르면, 시신에 남은 여러 상처는 살해 당시의 외상이 아니라, 떠오른 시체가 날카로운 얼음 아래를 끌리며 생긴 흔적일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손목을 묶고 있던 밧줄이 풀려 있었던 것도, 얼음과의 마찰로 인해 밧줄이 끊어진 결과일 수 있다.
‘무능함’은 유수포프가 남긴 이야기 속 또 다른 모순점도 설명해준다. 유수포프와 푸리셰케비치는 모두 회고록에서, 라스푸틴이 청산가리가 든 음식과 와인을 아무렇지 않게 삼켰다고 주장하며, 그가 독에 면역이라도 된 듯한 묘사를 남겼다. 그러나 1917년 부검에서는 라스푸틴의 체내에서 청산가리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의문은 일찍이 1934년, 작가 조지 윌크스가 『영국 의학 저널』에서 제기한 바 있다. 그는 유수포프의 묘사를 근거로 볼 때, 가능한 결론은 단 하나—라스푸틴은 처음부터 독을 투여받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라조베르트 박사가 라스푸틴을 독살하려 했다면, 그는 그 시도에 철저히 실패한 셈이다.” 거의 20년 뒤, 라조베르트 본인이 임종을 앞두고 이를 사실로 확인해준다. 그는 마지막 순간 양심의 가책과 의사로서의 히포크라테스 선서가 마음에 걸려, 청산가리를 무해한 물질로 바꾸어 넣었다고 고백한 것이다.결국 라스푸틴의 암살에 가담한 이들은 모두 가벼운 처벌만 받았다.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은 전선으로 전출됐고, 유수포프는 시베리아의 영지에서 가택 연금되었다.
라조베르트의 고백은 하나의 흥미로운 가능성을 열어준다. 만약 유수포프가 독이 바뀐 사실을 전혀 모른 채, 라스푸틴이 청산가리를 견뎌낸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믿었다’면, 그 믿음이 훗날 그의 회고록 속 훗날 ‘죽음을 거부한 자’라는 주장의 씨앗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결론
*Boney M. 싱글 엘범〈Rasputin〉(1978) – 라스푸틴 신화를 대중음악으로 확산시킨 유로팝 히트곡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은 필연적인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라스푸틴을 둘러싼 소문은 그의 실제 능력보다는 대중의 기대와 공포가 빚어낸 환상에 더 가까웠다. 그는 살아생전부터 이미 과장된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그 이야기들은 진실을 덮어버릴 만큼 강렬했다. 특히 독극물을 마시고도,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도 죽지 않고 버티다 얼어붙은 강물 속 에서야 숨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는 그를 인간을 넘어선 괴물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이제 그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허구인지 따지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라스푸틴의 이야기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서 메아리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