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한 군인들의 이야기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군인이 곧바로 무기를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어떤 이는 적의 기만이라 의심했으며, 또 어떤 이는 신념과 충성심으로 무기를 놓지 않았다. 명령 불복종, 개인적 신념, 존재 의미 같은 다양한 이유로 그들은 항복 대신 저항을 택했다. 단순한 군인의 역할을 넘어, 이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만의 전쟁을 계속했던 것이다. 이 글에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항복을 거부했던 군인들. 역사가 잊을 뻔했던, 그러나 누구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1. 헤르만 데츠너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프랑스 콩피에뉴 숲에서 체결된 "콩피에뉴 휴전 협정(Armistice of Compiègne)"을 통해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의 식민지 장교이자 탐험가였던 헤르만 데츠너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모른 채 1919년 1월까지 정글 속에서 버티며 항복을 거부했다. 그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측량사이자 정글 탐험가였고, 그의 행적은 다른 전쟁 잔류병들과는 조금 다른 형태로 전개되었다.
1914년 초, 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 그는 독일령 뉴기니(현재의 파푸아뉴기니)로 파견되었다. 임무는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닌 정글 탐사였다. 당시 독일은 태평양 지역에 여러 개의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었고, 뉴기니 일부 지역도 독일의 영토였다. 데츠너는 그곳에서 정글을 탐험하고 지도 제작을 위해 미개척 지역을 측량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몇 달 뒤,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호주군이 독일령 뉴기니를 점령했을 때, 그는 정글 깊숙이 들어가 있었고,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뒤늦게 전쟁 소식을 접했지만, 그는 항복하지 않았다. 대신, 몇몇 독일군 병사들과 현지 부족민들을 이끌고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열대 우림 속에서 숨을 곳을 찾아 이동하며 생존했고, 호주군과 영국군의 감시를 피해 몸을 숨겼다. 그는 독일 제국의 깃발을 내리지 않은 채 최소한의 저항을 지속했고, 때때로 정글을 탈출하려 시도했지만, 울창한 밀림과 험난한 지형 탓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처럼 오랜 시간 숨어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루터교 선교사들의 지원과 현지 부족민들의 협력 덕분이었다. 독일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던 선교사들은 식량과 보급품을 제공하며 그를 도왔고, 파푸아뉴기니의 일부 원주민 부족들은 정글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유럽인으로서는 최초로 뉴기니 내륙의 일부 지역을 탐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지도 두 달이 지난 1919년 1월, 그는 마침내 정글에서 나와 호주군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그의 항복은 일반적인 패잔병의 굴욕적인 항복과는 달랐다. 오히려 그는 마지막까지 독일 제국의 깃발을 지키며 생존한 탐험가이자 군인으로서 기록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식인종과 함께한 4년 (1921년 출판)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전쟁 기간 동안 밀림 속에서 적군을 피해 다니며 살아남은 이야기와, 탐험 과정에서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의 이야기는 독일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고, 그는 군인보다는 탐험가로 더 많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2. 하우데즌 작전 (Operation Haudegen)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독일은 북대서양 기상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노르웨이 스발바르 제도(Svalbard)에 극비 기상 관측소를 세우는 ‘하우데즌 작전’(Operation Haudegen)을 계획했다. 이 지역의 날씨는 북대서양과 유럽 전선에서의 작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정확한 기상 데이터 확보는 독일군에게 있어 필수적인 전략적 과제였다.
1944년 9월, 11명의 독일군 기상 관측병이 스발바르 제도의 가장 큰 섬인 스피츠베르겐(Spitsbergen)에 도착했다. 이들은 혹한의 기후 속에서 바람과 강설량, 기압 변화를 측정하며, 전선에 있는 독일군에게 기상 데이터를 전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들의 작전은 철저히 극비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일 본국조차 이들의 존재를 쉽게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며 전쟁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하우데즌 작전팀도 독일의 패전을 알리는 무전을 받았지만, 이후 독일군과의 모든 통신이 두절되었다. 독일 본토가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이면서, 본국에서는 이들을 철수시키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이다. 고립된 11명의 독일군은 혹독한 북극 환경 속에서 4개월 동안 생존해야 했다. 기온은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졌고, 거센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식량과 연료는 한정되어 있었으며, 밤에도 태양이 지지 않는 백야(White Night) 현상 속에서 생활해야 했다.
백야는 북극권과 남극권에서 여름철 발생하는 현상으로, 태양이 완전히 지지 않아 밤에도 하늘이 밝게 유지되는 기간을 뜻한다. 하우데즌 팀이 고립되어 있던 1945년 5월부터 9월까지는 스발바르 제도에서 백야가 지속되었으며, 이들은 몇 달 동안 밤에도 어두운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반대로, 시간이 지나 겨울이 다가오면 태양이 전혀 뜨지 않는 극야(Polar Night)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이처럼 밤낮 없이 계속 밝은 환경에서 수면 부족과 생체 리듬의 혼란을 겪었으며, 육체적 피로가 더욱 가중되었다. 게다가, 북극곰의 공격 위험까지 도사리고 있어 이들은 무기를 들고 철저히 경계 태세를 유지해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축된 식량과 보급품이 거의 다 소진되었고, 이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 결국, 무전을 통해 구조 요청을 보냈고, 1945년 9월 마침내 노르웨이의 사냥꾼들이 그들의 신호를 감지했다. 구조대는 노르웨이의 물개잡이 배를 보내 스발바르 섬에 도착했고, 9월 4일, 독일군 기상 관측병 11명은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하우데즌 작전팀의 항복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무기를 내려놓은 마지막 무장 독일군 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항복은 전장의 패잔병들이 겪는 치욕스러운 항복과는 달랐다. 구조를 위해 찾아온 노르웨이인들은 이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았으며, 독일군 역시 극한의 환경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이들에게 깊이 감사했다. 전쟁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한 이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생존과 투쟁의 기록이었다.
3. 오노다 히로
오노다 히로 중위는 ‘일본 잔류병’으로 알려진 인물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다. 일본 제국 육군의 정보 장교였던 그는 1944년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기에 필리핀 루방 섬에 배치되었다. 그의 임무는 정찰 및 게릴라전 수행이었으며, 상부로부터 어떠한 상황에서도 항복하지 말고 끝까지 저항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45년 2월, 연합군이 루방 섬을 점령하자 오노다는 세 명의 병사와 함께 밀림 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들은 원주민과 필리핀 경찰을 적군으로 간주하며 몇 년 동안 숲속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식량과 보급품이 끊긴 상황에서도 일본군의 승리를 믿으며 버텼고, 필요한 물자는 마을을 습격해 조달했다. 이 과정에서 약 30명의 필리핀 민간인을 사살했으며, 가축을 훔치고 주택을 불태우기도 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오노다의 동료들도 하나둘씩 사라졌다. 1950년, 동료 한 명이 필리핀 당국에 자수했고, 1972년에는 나머지 두 명이 경찰과의 교전 중 사살되었다. 이제 홀로 남은 오노다는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필리핀 군과 경찰의 수색 작전을 수십 차례 따돌렸다.
일본 정부는 그를 귀국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가족과 옛 동료들이 작성한 편지와 사진을 담은 전단을 섬 곳곳에 살포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이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오노다는 이를 모두 적의 심리전과 속임수라고 여겼다. 그에게 있어 ‘전쟁이 끝났다’는 말은 신뢰할 수 없는 정보였고, 지휘관의 공식 명령이 없이는 결코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었다.결국, 1974년 3월, 그의 옛 지휘관이었던 다나구치 요시오 전 소령이 직접 루방 섬으로 찾아와 공식적으로 임무 해제를 명령했다. 이때서야 오노다는 29년간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무기를 내려놓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일본 사회는 귀국한 오노다를 두고 '진정한 애국자' 또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엇갈린 평가를 내렸다. 그의 극단적인 충성과 불굴의 의지는 많은 이들에게 감탄을 자아냈지만, 필리핀에서 민간인을 학살한 행적이 문제시되기도 했다. 필리핀 정부는 그가 전쟁 중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그를 특별 사면 하였고, 오노다는 이후 일본을 떠나 브라질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과거의 신념을 간직한 채였으며, 일본 청년들에게 "조국에 대한 충성을 잊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는 2014년,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이 글은“(2부)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한 군인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