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2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한 군인들의 이야기

OUTNUMBERED 2025. 3. 20. 06:50

4. CSS 셰넌도어: 파란만장한 세계 일주

종전 후에도, 남부 해군 함선들 중 마직막까지 전쟁을 이어간 배 CSS 셰넌도어.
종전 후에도, 남부 해군 함선들 중 마직막까지 전쟁을 이어간 배 CSS 셰넌도어.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미국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노예제 존폐 문제와 연방 보존을 둘러싼 북부와 남부의 충돌이었다. 북부 연방(유니언)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며 산업 경제를 기반으로 했던 반면, 남부 연합(남부연합)은 농업 경제에 의존하며 노예제를 유지하려 했다. 결국 남부는 연방에서 탈퇴해 독립을 선언했고, 1861년 4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 섬터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CSS 셰넌도어의 선장 "제임스 워델"
CSS 셰넌도어의 선장 "제임스 워델"

 
전쟁은 북부의 우세로 기울었고, 1865년 4월 9일, 남군 총사령관 로버트 E. 리 장군이 항복하면서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의 종식 소식이 즉각적으로 전해지지는 않았고, 전 세계를 떠돌던 남부 해군 함선들은 여전히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까지 전쟁을 이어간 배가 CSS 셰넌도어였다.
 
이 배는 1864년 10월, 영국에서 남부연합이 구입한 후 북군의 상선을 급습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제임스 워델 선장의 지휘 아래, 셰넌도어는 대서양을 건너 인도양을 거쳐 태평양으로 이동했다. 1865년 여름, 베링해에서 미국 포경선들을 습격하며 북부 상업 해운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총 6척을 나포하고 32척을 불태웠으며, 1,000명이 넘는 선원을 포로로 잡았다. 그러나 이 공격의 대부분은 남부연합이 이미 붕괴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워델은 1865년 8월 2일이 되어서야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승무원들이 해적 혐의로 체포될 것을 우려해 항복을 거부했고, 배를 남아메리카 남단으로 돌려 영국으로 향했다.
 

CSS 셰넌도어가 영국 리버풀 항에서 최종적으로 항복하기까지의 이동경로.
CSS 셰넌도어가 영국 리버풀 항에서 최종적으로 항복하기까지의 이동경로.

 
이 과정에서 셰넌도어는 남군 함선 중 유일하게 지구를 일주한 배가 되었다. 마침내 1865년 11월 6일, 워델과 그의 부하들은 영국 리버풀 항에 도착해 영국 당국에 자진 항복했다. 이는 로버트 E. 리 장군이 항복한 지 거의 7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셰넌도어의 항복과 함께, 남북전쟁의 마지막 무장 저항이 공식적으로 끝났다.


5. 패배를 모르는 남부의 명장, 조셉 O. 셸비

남부연합 소속, "무패의 부대"의 장군 "조셉 O. 셸비"
남부연합 소속, "무패의 부대"의 장군 "조셉 O. 셸비"

 
대서양의 파도를 가르며 북군 함선에 맞섰던 CSS 셰넌도어의 마지막 항해처럼, 육지에서도 패배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조셉 O. 셸비(Joseph O. Shelby) 장군은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후에도 항복을 거부한 대표적인 남부연합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전쟁 내내 대담한 전술과 강한 전투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부대는 ‘무패의 부대’ 라는 별명을 얻었다. 셸비는 남북전쟁 기간 동안 미주리와 아칸소를 오가며 기습 공격과 게릴라전을 활용해 북군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1865년, 남부연합이 공식적으로 패배하면서 셸비 역시 운명의 선택을 해야 했다. 대부분의 남군 지휘관들이 항복하는 가운데, 그는 승복하는 대신 끝까지 싸우는 길을 택했다. 셸비는 “항복보다는 망명을” 외치며, 600명의 병사들과 함께 멕시코로 떠나는 극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사막을 가로질러 멕시코로 이동했으며, 1864년 막시밀리안 1세가 멕시코 황제로 즉위한 후 그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오스트리아 황제였으며,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지원을 받아 멕시코 제국을 건설했다. 남군 출신 병사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지만, 막시밀리안은 그들을 멕시코군으로 편입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에게 정착촌을 건설할 기회를 주었으며, 이곳이 바로 ‘칼로타 식민지(Carlota Colony)’였다.
 
칼로타 식민지는 한때 남부연합 출신 이주자들이 새로운 삶을 개척하려는 희망의 땅이었다. 그러나 1867년, 프랑스의 지원을 잃은 막시밀리안 1세가 폐위되고 처형당하면서, 이 정착촌도 함께 붕괴되었다. 셸비와 그의 부하들은 더 이상 머물 곳이 없었고,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 민간인으로 복귀할 수밖에 없었다.
 
셸비는 귀국 후 다시 군인이 되지 않았지만, 남부의 전통과 가치를 지킨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는 정치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미주리에서 농장과 사업을 운영하며 조용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남부연합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았고, 자신이 항복하지 않은 남군 지휘관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조셉 O. 셸비는 항복을 거부하고 끝까지 싸운 ‘무패의 장군’으로 남북전쟁의 역사 속에 남았다.


6. 발레르 공방전: 전쟁이 끝난 줄 몰랐던 스페인 최후의 수비대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은 필리핀 독립 투쟁과 맞물려, 머나먼 필리핀에서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은 필리핀 독립 투쟁과 맞물려, 머나먼 필리핀에서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898년, 스페인-미국 전쟁과 필리핀 혁명의 격동 속에서, 필리핀 반군과 스페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가 있었다. 이는 필리핀의 작은 마을 발레르(Baler)에서 시작되었으며, 57명의 스페인군이 800명의 필리핀 반군에 맞서 싸운 공방전이었다. 당시 스페인은 16세기부터 필리핀을 지배하며 300년 넘게 식민 통치를 이어왔다. 그러나 19세기 말, 필리핀 독립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식민 통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1896년, 필리핀 독립운동가 에밀리오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스페인에 저항하는 필리핀 혁명이 발발했고, 곳곳에서 반군과 스페인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 1898년 4월,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서 스페인-미국 전쟁이 발발했다.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필리핀을 공략했고, 1898년 5월 마닐라만 전투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했다. 이 패배로 스페인은 필리핀에서의 전세를 완전히 잃었고, 마닐라를 비롯한 주요 거점이 미국과 필리핀 반군의 손에 들어갔다. 같은 해 6월, 아기날도는 필리핀 제1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하며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 대한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하지만 필리핀 곳곳에는 아직도 스페인군 잔존 병력이 남아 있었고, 발레르에 주둔한 소규모 스페인군도 그중 하나였다.
 
1898년 6월, 필리핀 반군 800명이 발레르 마을을 포위했다. 당시 마을을 지키고 있던 스페인군은 단 57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석조 교회로 퇴각해 바리케이드를 구축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지휘관 엔리케 데 라스 모레나스 대위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웠다.
 

필리핀 반군에 저항하던 스페인 군 57명은 석조 교회로 퇴각해 농성에 들어갔다.
필리핀 반군에 저항하던 스페인 군 57명은 석조 교회로 퇴각해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의 싸움은 단순한 전투를 넘어 생존과의 사투였다. 한정된 식량은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고, 말라리아와 이질 같은 질병이 부대 내에 확산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적의 총탄보다 질병이 더 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비극적 상황이 전개됐다. 가장 큰 문제는 본국과의 완전한 소통 단절이었다. 스페인으로부터 어떠한 지시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이들은 항복 여부마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필리핀군은 수차례 스페인군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전쟁이 이미 종결됐다는 내용을 담은 신문과 편지를 전달하며 설득했지만, 스페인군은 이를 적의 교묘한 기만책으로 간주했다. 본국의 공식 명령 없이는 절대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다는 군인으로서의 원칙과 조국에 대한 맹목적 충성심이 그들의 판단을 가렸다.
 
발레르 수비대가 고립된 채 사투를 벌이는 동안, 스페인 본국에서는 역사적 전환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연이은 패배를 당한 스페인은 1898년 12월 10일, 파리 조약을 통해 필리핀을 미국에 완전히 양도했다. 필리핀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발레르의 스페인군은 이 중대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농성이 시작된 지 거의 1년이 지난 1899년 6월 2일, 마르틴 세레소 중위는 필리핀군이 전달한 신문에서 우연히 자신이 잘 아는 장교의 약혼 소식을 발견했다. 그제야 세레소 중위는 필리핀군이 전해온 정보가 사실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세레소 중위는 부하 장교들을 보내 필리핀 주둔 스페인군 사령부에 진위 여부를 확인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스페인군은 이미 필리핀을 떠난 뒤였다. 오랜 조사 끝에,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싸우던 전쟁이 이미 오래전에 종결됐다는 쓰라린 현실을 직면하게 됐다.
 

1899년 6월 2일, 337일간의 농성을 마치고 투항한 발레르 수비대.
1899년 6월 2일, 337일간의 농성을 마치고 투항한 발레르 수비대.

 
 
1899년 6월 2일, 발레르 수비대는 337일간의 기나긴 농성을 마치고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전쟁이 끝난 지 무려 6개월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살아남은 33명의 병사들은 초췌한 모습으로 교회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스페인으로 귀환해 "발레르의 영웅들” 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조국에 대한 충성과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추앙 받았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이후 여러 영화와 문학 작품을 통해 역사 속에 깊이 새겨졌다.


끝까지 싸운 자들, 그리고 남겨진 이야기

전쟁이 끝났지만, 모든 이가 무기를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는 전쟁의 끝을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돌아갔지만, 어떤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지키려 했던 것들은 점차 의미를 잃어갔다. 멕시코의 사막에서, 남아메리카의 정글에서,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그들은 세상이 변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자들도 있었고, 조국이 이미 그들을 잊어버렸음을 끝내 인정하지 못한 자들도 있었다. 그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어떤 이는 충성과 용기의 상징이 되었고, 어떤 이는 시대착오적 존재로 외면 받기도 했다. 끝내 돌아오지 못한 자들은 이름 없이 사라지거나, 그들의 이야기는 전설이 되어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총성이 멈춘 자리에는 세월이 쌓이고, 전장은 변했지만, 그들의 발자취는 역사의 한 페이지에 깊이 새겨져 있다.
 
 
(1부)끝까지 항복을 거부하며 저항한 군인들의 이야기”는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