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1부) 전설이 된 실존하지 않았던 미스터리한 장소들

OUTNUMBERED 2025. 3. 24. 16:17

역사에는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장소들이 있다.
역사에는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장소들이 있다.

 

역사에는 한때 실존한다고 믿었지만, 끝내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상상 속에만 깊이 각인된 장소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며 단순했던 이야기에는 수많은 허구가 덧붙여졌고, 그렇게 부풀려진 이야기들은 전설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동방 어딘가의 존재했다는 전설적인 기독교 제국부터 북미 대륙 깊숙이 숨겨져 있다고 믿었던 황금 도시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결국 신화로 남은 여섯 곳의 미스터리한 장소들을 함께 들여다보자.


사제 왕 요한의 기독교 왕국

중세 유럽인들은 극동 어딘가 사제 왕 요한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극동 어딘가 사제 왕 요한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500년 넘는 시간 동안, 아프리카나 인도, 또는 극동 어딘가에 거대한 기독교 왕국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이 전설은 1165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에게 ‘프레스터 존(사제 왕 요한)’이라는 인물이 보냈다고 전해지는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되었다. 이 편지는 발신자나 전달 경로가 불분명하고, 내용도 비현실적인 요소들로 가득해 오늘날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불안하던 유럽 사회에 희망을 심기 위한 종교적 선전물, 즉 위조 문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사제 왕 요한은 자신이 광활한 영토와 72개의 왕국을 지배하는 통치자라고 소개했다. 그의 나라는 황금이 풍부하고 풍요로우며, 거인이나 요정 같은 상상 속 존재들이 인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환상의 땅으로 묘사되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그의 백성들 모두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강조했다. 사제 왕 요한의 전설은 유럽 전역으로 퍼지며 오랫동안 사람들의 상상 속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십자군들은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그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것이라 믿었고, 13세기 초 몽골 제국이 페르시아를 침공하자 이 사건을 사제 왕 요한의 군대의 출현으로 오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245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몽골과의 외교적 관계를 모색하는 동시에, 사제 왕 요한의 왕국이 몽골 제국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사절단을 동방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그런 왕국을 찾지 못한 채 귀환하거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후 마르코 폴로는 중국 북부에서 그 흔적을 보았다는 이야기를 남겼고, 바스 다 가마를 비롯한 포르투갈 탐험가들은 아프리카와 인도를 탐험하며 전설 속 왕국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결국 에티오피아에서 기독교 국가를 발견하긴 했지만, 사제 왕 요한이 묘사한 찬란한 문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전설은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고, 한때 유럽의 지도에까지 등장했던 이 상상의 왕국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비의 섬: 하이브라실

고대 지도에 기록되어있는 신비의 섬 "하이브라실"
고대 지도에 기록되어있는 신비의 섬 "하이브라실"

 

유럽인들이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탐험가들은 아일랜드 서쪽 해안 어딘가에 숨겨진 신비의 섬, 하이브라실을 찾아 수많은 항해를 떠났다. 이 섬의 이야기는 켈트족 전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며, ‘하이브라실’이라는 이름은 게일어로 ‘축복받은 섬’을 뜻한다. 그러나 그 정확한 기원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세기 무렵부터 하이브라실은 유럽의 지도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일반적으로 좁은 해협에 둘러싸인 작고 둥근 섬으로 그려졌다. 19세기까지도 많은 선원들이 이 섬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고, 하이브라실은 오랫동안 신화와 민담의 단골 소재로 자리잡았다. 어떤 전설에서는 이 섬을 ‘잃어버린 낙원’이나 이상향으로 묘사했고, 또 어떤 이야기에서는 짙은 안개에 가려져 있다가 7년에 한 번, 맑은 날씨에만 눈에 띈다고 전해진다.

 

그 신비로운 이미지 덕분에 하이브라실은 15세기에도 여전히 탐험의 대상이었다. 영국 출신 항해사이자 아메리카 대륙을 탐사한 초기 인물 중 한 명인 존 캐벗(John Cabot) 역시 이 전설의 섬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항해에 나섰다. 그는 1497년, 오늘날 캐나다 동부에 위치한 뉴펀들랜드(Newfoundland) 해안에 도달한 역사적인 항해 중에도 하이브라실을 발견하길 기대했다고 한다.

 

당시 남아 있는 문서들에는 그보다 앞서 이미 어떤 선원들이 하이브라실이라는 섬에 도달했다는 기록이나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섬의 위치나 묘사가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의 일부와 유사한 점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하이브라실을 찾기 위해 떠난 중세 유럽의 항해자들 중 일부가 의도치 않게 북미 해안에 도달했을 가능성, 즉 콜럼버스보다 먼저 신대륙에 발을 디뎠을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 있다.


북쪽 바다 끝: 미지의 땅 툴레

1539년,올라우스 마그누스의 지도 "카르타 마리나"에 그려진 "툴레"
1539년,올라우스 마그누스의 지도 "카르타 마리나"에 그려진 "툴레"

 

툴레는 고대 그리스의 항해가부터 낭만주의 시인, 그리고 나치 독일에 이르기까지, 시대를 초월해 다양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전설 속의 땅이다. 이 미지의 지역은 스칸디나비아 인근 북대서양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여겨졌으며, 현실 세계의 끝자락, 알려지지 않은 북쪽 세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툴레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기원전 4세기에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의 항해가이자 지리학자인 피테아스(Pytheas)는 오늘날 프랑스 마르세유 지역에 해당하는 고대 도시 마시리아 출신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지중해를 넘어 북유럽까지 항해한 인물이었다. 그는 북쪽 바다를 따라 항해한 끝에 스코틀랜드 너머의 미지의 땅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곳을 ‘툴레’라고 불렀으며, 해가 지지 않고, 땅과 바다, 공기의 경계가 흐릿하게 섞여 마치 현실과 비현실이 뒤엉킨 것 같은 낯선 세계였다고 묘사했다. 당시 그의 설명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 여겨져 많은 이들의 의심을 샀지만, 이후 ‘먼 툴레(Ultima Thule)’는 유럽인들의 상상 속에서 알려진 세계의 북쪽 끝, 혹은 문명과 현실의 경계를 넘어선 상상의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 신비로운 땅은 18~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도 소환되었다. 당시 유럽 문학계에서 자연과 감정,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던 낭만주의 시인들은 툴레를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순수한 세계, 현실 너머의 이상향으로 묘사했다.

 

다시 툴레가 역사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결성된 툴레 협회(Thule Society)를 통해서였다. 이 단체는 툴레를 아리아인의 기원이자 순혈 민족의 신성한 고향으로 신격화했으며, 민족주의와 신비주의를 결합한 이데올로기를 퍼뜨렸다. 툴레 협회는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이자 나치 부총통이 된 루돌프 헤스 등 나치 지도자들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결국 툴레는 신화의 경계를 넘어, 왜곡된 이념과 결합하며 역사 속 어두운 서사의 한 축이 되었다.

 

독일 나치 산하 툴레 협회의 공식 문서 양식
독일 나치 산하 툴레 협회의 공식 문서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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