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불모지에서 일군 꿈: 삼성의 시작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 대구의 어느 허름한 골목, 낡은 간판 아래 희뿌연 먼지가 내려앉은 가게 안. 깡마른 체구에 형형한 눈빛을 지닌 청년 이병철은 쌀독을 살피고, 장부를 매만지며 조용히 손님을 기다렸다. 그의 손때가 묻은 주판알은 쉴 새 없이 움직였고, 이따금씩 새어 나오는 한숨은 팍팍한 현실을 짐작하게 했다. 쌀과 건어물 몇 줌, 그리고 직접 빚은 국수를 팔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 그 누구도 그가 훗날 한국 경제를 뒤흔들 거대한 제국, 삼성의 창업주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1938년, 서른을 바라보던 이병철은 협동 정미소를 인수하며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얼마 후,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무역업에 뛰어들었다. 청과물과 건어물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그곳에서 들여온 물건을 팔아 이윤을 남겼다. 만주까지 직접 누비며, 때로는 사기꾼에게 속아 빈털터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칠전팔기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섰다. 마치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뿌리를 내리는 선인장처럼, 이병철은 그렇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회고록 속의 이병철
이병철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하지만 나는 그 실패를 통해 더 강해졌고, 더 현명해졌다."

그의 말처럼, 삼성의 시작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실패와 좌절, 그리고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병철은 자신만의 경영 철학을 정립했고, 훗날 삼성을 이끌어갈 인재들을 키워냈다.
거대한 제국의 그림자

한국 전쟁의 포화를 딛고, 이병철은 제조업으로 눈을 돌렸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하며 한국 경제 재건의 선봉에 섰고, 이후 전자, 중공업, 화학, 금융, 건설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며 삼성을 명실상부한 한국 최대의 재벌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한국 GDP의 20%를 차지하는 거대 공룡. "삼성 공화국"이라는 농담 섞인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인에게 삼성은 단순한 기업 로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스마트폰, 가전제품은 물론 건설, 금융, 의료, 중공업, 심지어 패션과 엔터테인먼트까지, 80개에 달하는 자회사를 거느린 삼성은 마치 신화 속 괴수 히드라처럼 한국 사회 곳곳에 그 머리를 들이밀고 있다. 그들의 손길은 삶의 구석구석에 닿아 있으며, 그 영향력은 경이로움을 넘어 묘한 위압감마저 느끼게 한다. 그러나 화려한 겉모습 속에는 제국의 은밀한 비밀, 즉 '재벌'이라는 이름의 세습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서구 기업과는 달리, 삼성은 창업주 가문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마치 중세 봉건제를 연상시키는 지배 구조를 유지해왔다. 이건희 회장으로 대표되는 이씨 가문은 혁신과 성장을 이끌며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워냈지만, 동시에 법 위에 군림하는 듯한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

이건희 회장의 불호령은 삼성의 혁신을 상징하는 문구로 회자되지만, 그 이면에는 '황제 경영'이라는 그늘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그늘은 이재용 부회장 시대에 더욱 짙어졌다.
균열의 시작: 이재용과 국정농단

2017년, 이재용 부회장이 연루된 국정농단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대통령의 비선 실세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윤리 경영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고, 재벌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단순한 뇌물 스캔들을 넘어, 정경유착이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비록 이재용 부회장은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여전히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씁쓸한 자조 섞인 유행어는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불평등을 상징하는 듯하다.
2017년 국정농단의 소용돌이가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삼성 앞에는 여전히 거친 파도가 일렁였다. 잠잠해진 바다는 폭풍 전의 고요함이었을까. 위기는 쉴 틈 없이 삼성을 덮쳤다.
반도체 겨울, 그리고 무역 전쟁
2018년 하반기, 반도체 시장에 찬바람이 불어 닥쳤다. 호황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메모리 반도체 가격은 곤두박질쳤다. 삼성전자의 수익성은 악화일로를 걸었다. 설상가상으로 미중 무역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까지 몰아쳤다. 미국은 중국의 화웨이를 겨냥했고, 화웨이는 휘청거렸다. 삼성은 경쟁자의 추락에 미소 지을 틈이 없었다. 중국 시장은 더욱 얼어붙었고,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정책은 삼성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포탄 파편처럼, 불확실성은 짙은 안개가 되어 삼성의 앞길을 가렸다.
일본의 칼날

2019년 7월, 일본은 예고 없이 칼을 빼 들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핵심 소재인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를 한국으로의 수출을 틀어막았다.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했지만, 속내는 뻔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숨통을 조이려는 수작이었다. 삼성은 물론 한국 기업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소재 수급에 비상이 걸렸고, 공장이 멈출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삼성은 재빠르게 다른 공급처를 찾아 나섰고, 소재 국산화에 속도를 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한국 반도체 산업의 허약한 민낯, 그 공급망의 취약한 고리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보이지 않는 적, 팬데믹

2020년,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바이러스. 보이지 않는 적은 국경을 넘어 삼성을 덮쳤다. 글로벌 공급망은 마비됐고, 사람들은 지갑을 닫았다. 공장은 멈추고, 거리는 텅 비었다. 스마트폰 사업은 직격탄을 맞았다. 오프라인 매장은 문을 닫았고, 신제품 출시는 연기됐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기회는 있었다. 비대면, 언택트 시대가 성큼 다가왔다. 반도체 수요는 오히려 늘었고, 가전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삼성은 비상경영 체제를 가동했고, 온라인 마케팅을 강화하며 버텼다.
총수의 부재

2021년 1월, 이재용 부회장이 다시 법정에 섰다.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 6개월, 법정 구속. 삼성은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리더의 부재. 의사결정은 늦어지고, 투자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삼성은 전문경영인 체제를 강화하며 빈자리를 메우려 했지만, 굵직한 결정들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해 8월, 이재용은 가석방됐지만, 취업 제한이라는 족쇄는 여전히 그를 옭아맸다.
GOS, 신뢰의 균열

2022년, 갤럭시 S22 시리즈에서 터진 GOS(Game Optimizing Service) 사태. 고사양 게임을 실행하면 발열을 잡기 위해 성능을 강제로 낮추는 기능. 문제는 삼성이 이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는 것. 벤치마크 앱에서는 교묘하게 성능 저하를 피해갔다. 사용자들은 분노했다. 성능을 과장 광고했다며 삼성을 질타했다. 집단 소송의 움직임까지 일었다. 삼성은 황급히 GOS 업데이트를 통해 사용자에게 선택권을 줬지만, 이미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024년의 대폭락
2024년, 삼성전자는 4천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기업 가치를 자랑했지만, 7월부터 시작된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매는 그 위상을 단숨에 뒤흔들었다. 단 몇 달 만에 사라진 1,220억 달러. 시가총액의 절반이 증발하는 대참사였다. 거대했던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힌 것처럼, 삼성은 휘청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삼성 내부의 구조적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세 가지 치명적인 문제: 기회 상실, 경쟁력 약화, 리더십 혼란
1. AI라는 신세계, 기회의 문을 닫아버리다
"모두가 AI라는 황금 열차에 올라타 막대한 부를 거머쥘 때, 삼성은 플랫폼에 서서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AI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엔비디아는 AI 구동에 필수적인 GPU 시장을 장악하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와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HBM3E(고대역폭 메모리)라는 최신 기술을 선점하며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삼성은 HBM3E 개발에 실패하며 엔비디아와의 공급 계약을 놓쳤고, 이는 AI 시대의 주도권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삼성은 마치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채 과거의 영광에만 얽매인 늙은 왕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2. 본업의 위기: 칩 제조 경쟁에서 밀려나다

삼성의 "엑시노스 칩은 고질적인 발열 문제와 성능 저하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고, 퀄컴 스냅드래곤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 삼성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 그 중에서도 칩 제조 분야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자체 개발한 엑시노스 칩은 경쟁사인 퀄컴의 스냅드래곤에 비해 성능과 발열 관리 측면에서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심지어 삼성은 자사의 플래그십 스마트폰에도 스냅드래곤을 탑재하는 굴욕을 겪어야 했다. 더 큰 문제는 TSMC와의 격차였다. 2024년 기준, TSMC는 전 세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 점유율의 61.7%를 차지하며 독주하고 있는 반면, 삼성은 11%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TSMC는 3나노 공정이라는 최첨단 기술을 앞세워 애플, 엔비디아, AMD와 같은 굴지의 기업들을 고객사로 확보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반면 삼성은 수율(생산품 대비 양품 비율) 문제로 어려움을 겪으며 TSMC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3. 리더십의 혼란: 제국의 미래는 어디로?
"마치 선장이 수시로 바뀌는 배처럼, 삼성은 명확한 방향성을 잃고 표류하는 듯했다."

잦은 CEO 교체와 엇갈리는 전략은 삼성 내부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 경계현 사장의 해임과 전영현 부회장의 임명은 위기 속에서 던져진 마지막 카드였지만, 그 카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경직된 위계질서와 비효율적인 의사결정 구조는 혁신의 발목을 잡았고, 이는 곧 글로벌 경쟁력 약화로 이어졌다. 이재용 부회장의 리더십은 과거 이건희 회장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리더십은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동시에 부패 스캔들로 얼룩져 신뢰를 잃었다. 이재용 부회장은 2017년 국정농단 사건 이후에도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의혹 등 각종 논란에 휩싸이며 사법 리스크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결론: 삼성이라는 거울, 그 속에 비친 한국 경제의 초상

삼성이라는 거울에 비친 것은 바로 한국 경제의 자화상. 그들의 흥망성쇠는 곧 우리의 미래와 직결된다. 그들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 현실을 외면할 것인가. 아니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하며 새로운 항로를 개척할 것인가. 혁신의 돛을 높이 달고, 변화의 바람을 타고 다시 한번 비상할 것인가. 아니면, 낡은 지도에만 의존하다가 결국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 것인가.이 드라마의 결말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삼성이라는 거대한 배의 항해를 지켜보는 우리 모두는 눈을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삼성은, 그리고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P.S. 이 글은 한국 사람이지만 이방인인 제가,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의 위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엿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눠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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