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역사상 가장 황당했던 경매 5가지

OUTNUMBERED 2025. 6. 9. 11:15

경매란 공개적인 경쟁을 통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거래 방식이다.
경매란 공개적인 경쟁을 통해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거래 방식이다.

 

명품 가방부터 한정판 운동화, 고미술품, 심지어 유명 연예인의 소장품까지, 세상에는 경매에 나오지 않는 것이 거의 없다. 이제는 단 하나뿐인 수집품이나 예술 작품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는 일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과거 경매 사례를 살펴보면,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이례적인 물건들이 실제로 거래된 기록이 있다. 이 글에서는 역사상 가장 독특했던 다섯 건의 경매 사례를 살펴본다. 그 물건은 왜 경매에 나왔고, 이 비상식적인 거래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 뒤에 어떤 이야기를 남겼는지 객관적인 기록을 통해 추적해 보려고 한다.


로널드 레이건의 혈액 샘플

미합중국 40번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미합중국 40번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2012년 5월, 한 수집가가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혈액 샘플을 경매에 올렸다. 누군가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일 수 있지만, 판매자는 자신을 ‘레이거노믹스 (정부 규제 완화와 감세를 통해 시장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레이건 행정부의 경제 정책)’의 열렬한 지지자라 소개하며 "레이건 대통령 본인이라면 자본주의 원칙에 따라 이 샘플을 파는 것을 오히려 선호했을 것"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펼쳤다. 그는 먼저 레이건 국립 도서관에 판매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이를 공개 경매에 내놓았다.

 

이 샘플은 1981년 3월 30일, 레이건 대통령 암살 시도 사건 이후 레이건 대통령이 입원했을 당시 채취된 것으로, 당연히 유족의 동의는 없었다. 판매자는 처음에 레이건 국립 도서관에 거래를 제안했지만 거절당하자 공개 경매에 내놓았다. 경매품의 공식 설명에는 “유리병 마개 끝에 0.6cm 크기의 말라붙은 혈흔이 남아 있다”는 매우 구체적인 묘사가 포함되었다. 반응은 뜨거웠다. 경매가 시작되자 입찰가는 3만 달러를 넘어섰지만, 대통령의 혈액을 거래하는 행위에 대한 윤리적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결국 거센 여론에 부담을 느낀 판매자는 경매를 철회하고 문제의 혈액 샘플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단에 기증하는 것으로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2012년 5월 미국의 한 수집가가 로널드 레이건의 혈액 샘플을 경매에 올렸다.
2012년 5월 미국의 한 수집가가 로널드 레이건의 혈액 샘플을 경매에 올렸다.


18만 마리의 고대 이집트 미라 고양이

리버풀 인류학 박물관의 고양이 미라. 19세기 말, 비료로 팔려갈 뻔한 운명에서 살아남아 고대 이집트의 동물 숭배와 미라 제작 풍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리버풀 인류학 박물관의 고양이 미라. 19세기 말, 비료로 팔려갈 뻔한 운명에서 살아남아 고대 이집트의 동물 숭배와 미라 제작 풍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1889년, 이집트 베니 하산 지역에서 거대한 고양이 미라 매장지가 우연히 발견됐다. 발굴된 고양이만 무려 18만 마리에 달했다. 이들은 약 3,000~4,000년 전 고대 이집트에서 신에게 바치기 위해 사육되고 미라 처리된 고양이들로, 당시에는 신성한 제물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이 유물들은 ‘신성함’이 아닌 ‘자원’으로 여겨졌다. 이집트는 당시 사실상 영국의 식민지였고, 고고학적 보존 개념은 희박했다. 결국 이 대규모 미라는 상업적 가치를 가진 수출품이 되어 영국으로 실려갔다.

 

1890년 초, 이집트에서 배에 실린 고양이 미라들은 리버풀 항에 도착했다. 경매 주관은 제임스 고든 앤드 컴퍼니가 맡았으며, 고양이 미라 약 19톤 분량이 경매에 올랐다. 유물의 상태는 대부분 붕대가 풀리고 부스러진 형태였지만, 일부는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경매는 마치 코미디의 한 장면이었다. 포장지처럼 싸인 미라가 손에 들자마자 바스러졌고, 경매인은 고양이 머리를 망치처럼 사용해 낙찰을 선언했다는 풍문까지 퍼졌다. 당시 언론은 이를 조롱하며 ‘퍼-틸라이저(fur-tilizer)’라는 표현을 써가며 기사화했다. “fur-tilizer” — 고양이의 털(fur)과 비료(fertilizer)를 합성한 조어였다. 즉, “고양이 비료”, 말 그대로 털 난 동물이 비료로 전락했다는 신랄한 풍자였다.

 

이 경매에서 일부 미라는 수집가와 학자들에 의해 개별 낙찰되었고, 박물관에 기증되거나 연구 목적으로 보존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리버풀의 비료 회사에 톤 단위로 팔려갔다. 미라의 뼈는 인광 성분이 많아 당시 영국 농업에서 비료 원료로 쓰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만 마리의 고양이 유해가 갈려 뿌려졌고, 신전 제물로 바쳐졌던 고대 고양이들은 그렇게 영국의 밭으로 스며들었다. 요컨대 1889~1890년의 고양이 미라 발굴과 경매 사건은 19세기 말 식민지 고고학의 민 낯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풍부한 유물이 학술 연구와 전시의 대상으로 주목받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채 산업 원료로 소비되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건은 문화유산 보존 윤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례로 남아 있다.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도서 경매

'포르타스 사기극'의 가짜 경매 카탈로그.
'포르타스 사기극'의 가짜 경매 카탈로그.

 

1840년 8월 10일, 벨기에의 작은 도시 벵슈에서 열릴 예정이던 ‘포르타스 백작 도서 경매’는 당시 유럽 서지학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었다. 고 J.N.A. 드 포르타스 백작은 세상에 단 한 권만 존재하는 책만 수집한 인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이 소장한 책의 다른 사본이 발견되면 해당 도서를 즉시 폐기하고, 장부에 “destruit!(파괴됨!)”이라는 주석까지 달았다는 전설이 전해졌다. 사망 당시 그의 도서관에는 단 52권만이 남아 있었고, 이 중 상당수는 그 희귀성과 괴상한 주제 때문에 수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예컨대 고대 이집트의 남근 상형문자에 관한 연구서, 중세시대 외설적인 가사로 유명했던 민요집, 당시 유력한 귀족 가문의 ‘불미스러운 행동’을 기록한 책 등이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어떤 유럽 귀족 여성의 개인적인 가정사를 기록한 책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값을 상관하지 말고 무조건 낙찰받으라”는 지시와 함께 대리인을 보냈다고도 전해진다.

 

경매가 열린다는 소식이 퍼지자, 프랑스와 영국, 독일의 내로라하는 학자들과 고서 수집가들이 하나둘 벵슈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8월 10일, 아무리 찾아도 경매장이라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고, 마을 사람들 역시 ‘포르타스 백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수집가들은 황당해했지만, 그제야 진실이 드러났다. 이 모든 사건은 프랑스의 은퇴 군인이자 골동품 애호가였던 르네 샬롱(René Chalón)이 벌인 대형 장난이었다. 그는 가상의 인물 포르타스 백작을 창조하고, 실재하지 않는 도서 목록을 교묘하게 꾸며낸 뒤, 당대 지적 허영심 강한 수집가들의 성향을 파고들었다. 목록에는 가짜 책이었음에도 실제 논문처럼 정교한 설명과 출처가 달려 있어,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심지어 경매 장소와 공증인 이름, 정확한 날짜까지 포함된 초청장이 수십 명의 수집가들에게 발송됐다.

 

샬롱은 벵슈에 실제 존재하지 않는 거리 주소와 가공의 인물을 설정해 초대장을 보냈고, 수신자들은 이 초대를 자신만 받은 특별한 정보로 착각하며 극비리에 움직였다. 그러나 결국 경매 장소는커녕 백작도, 장서도, 도서관도 모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며, 수집가들은 당혹감과 분노, 허탈함 속에 돌아가야 했다. 벵슈 주민들 역시 갑자기 몰려든 외지인들로 인해 혼란에 빠졌고, 마을 행정기관은 실제로 외지인의 마을 출입 제한을 고려할 정도로 불쾌해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 기묘한 가짜 경매 사건은 이후 전설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경매 카탈로그는 되레 진짜 수집품이 되었다. 이 인쇄본은 그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꾸며진 가짜 경매 목록”이라 불리며 희귀본 시장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2005년에는 원본 한 부가 1,320달러에 낙찰됐고, 2020년대에는 영국에서 수천 파운드를 호가하며 거래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서지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포르타스 사기극(Fortsas hoax)”으로 부르며, 과거 수집 세계에서 허영심과 집착이 얼마나 쉽게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를 상기시키는 사례로 회자하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도서 경매에서 시작된 이 장난은, 결국 존재하지 않기에 가장 희귀한 유산이 되었다.


전서구 경매

1901년 크리스마스, 뉴욕 타임스는 짤막한 기사를 하나 실었다. 제목은 ‘해군 비둘기, 퇴역 예정’. 브루클린 해군기지에서 오랫동안 통신 임무를 맡아온 전서구 55마리를, 다음 주 월요일에 매각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미 해군은 뉴욕뿐 아니라 전국의 여러 기지에서 비둘기들을 훈련시켜 실전에 투입해왔다. 군함에서 작전 중, 해군 장교가 비둘기 다리에 문서를 묶어 날리면, 훈련된 비둘기가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본부로 되돌아가는 식이었다. 무선 통신은커녕 안정적인 전신망조차 갖춰지지 않았던 시대, 이 깃털 달린 ‘통신병’은 의외로 정확하고 쓸모 있었다.

 

전서구: 먼 거리를 날아 정확하게 집을 찾아오는 능력으로 과거 통신원 역할을 했던 비둘기.
전서구: 먼 거리를 날아 정확하게 집을 찾아오는 능력으로 과거 통신원 역할을 했던 비둘기.

 

하지만 이내 상황이 달라진다. 이탈리아의 젊은 발명가 구글리엘모 마르코니가 전파를 이용한 무선 송수신 기술을 개발하며, 통신의 판이 바뀌었다. 마르코니의 기술은 해군 함대 간의 실시간 교신을 가능하게 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에게 작전 메시지를 맡길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군 당국은 비둘기 부대를 ‘구식’으로 간주했고, 결국 퇴역 명령이 떨어졌다. 하지만 곧 뜻밖의 문제가 드러났다. 이 비둘기들은 단순히 어디든 날아가는 존재가 아니었다. 귀소 본능에 기반한 훈련을 통해, 오직 자신이 태어난 해군기지로만 되돌아오도록 길들여져 있었던 것이다. 민간인이 이들을 사들여도, 새는 결국 낯선 집을 버리고 해군기지를 향해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결국 이들은 '해군 전용' 통신 수단이었던 셈이다. 문자 그대로, 해군만을 위한 비둘기였다. 그래서였을까, 해군 기지에서는 당시 원가 1마리당 8달러였던 비둘기 150마리를 (당시 비둘기 한 마리의 가격은 약 8달러 정도로 책정되었지만, 수개월에 걸친 훈련과 전서구로서 수행한 임무를 고려하면 그 가치는 단순히 숫자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도합 30달러에 헐값 처분했고, 구매자는 이들을 사격 연습용 표적으로 사용했다. 한 시대의 통신 기술이 ‘총알받이’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해군이 들여온 최신 무선통신 장비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지만, 완벽하진 않았다. 전파 간섭은 빈번했고, 수신 거리도 제한적이었으며, 전력 공급 문제도 자주 발생했다. 종합적으로 보면, 날개 달린 통신병들을 대체하기엔 시기상조였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날개 달린 통신병들은 다시 실전 배치된다. 참호—즉, 땅을 파 만든 좁고 깊은 전장 방어선—속에 갇힌 병사들에게 통신은 생존 그 자체였다. 유선 전화는 포격 한 번이면 끊겼고, 무전기는 무겁고 고장도 잦아 최전방에서는 사실상 쓸 수 없었다. 이때 남은 건, 오직 비둘기뿐이었다.

 

1918년, 프랑스 전선에서 고립된 미군의 한 대대는 마지막 한 마리 비둘기에게 구조 요청 메시지를 맡긴다. 그 새의 이름은 ‘셔 아미(Cher Ami)’ — 프랑스어로 ‘친애하는 친구’이다. 셔 아미는 총상을 입고 한쪽 다리를 잃으면서도, 끝내 아군 기지까지 날아가 임무를 완수해, 194명의 생명을 구해냈다. 전쟁 후 이 작은 영웅은 미국 프랑스 양국에서 훈장을 받았고, 지금은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다. 2차 세계대전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전기는 기술적으로 진일보했지만, 여전히 고장이 잦고 불안정했다. 연합군은 5만 마리가 넘는 비둘기를 전선에 투입했고, 이들 중 일부는 눈부신 공로로 ‘동물공로훈장(Dickin Medal)’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황한 건 독일군이었다. 날아드는 비둘기를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자, 급기야 비둘기의 천적 매를 훈련시켜 하늘로 날려보내기에 이른다. 하지만 문제는 곧 드러났다. 매는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었고, 결국 전장이든 후방이든, 눈에 띄는 비둘기라면 가리지 않고 공격했다. 효과는 제한적이었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됐다. 그렇게 전서구들은 매의 위협을 피해가며, 무너진 통신망과 혼란스러운 전선 사이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냈다.

 

1957년, 미군은 마지막 비둘기 통신 부대를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무전기와 위성 통신 같은 보다 빠르고 안정적인 기술이 실용화되면서, 비둘기의 역할은 점차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비둘기는 유효한 통신 수단으로 활용됐다. 무전기가 고장 나거나 고립된 상황에서, 이 작은 새들은 작전 명령을 전하며 수많은 생명을 살렸다. 한때 퇴역했던 비둘기들이 다시 전장에 투입된 사례는, 첨단 기술이라 해도 모든 상황을 완벽히 대체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로마 제국의 통치권이 경매로 부쳐지다

서기 193년, 로마 제국에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황제를 선출하거나 계승하는 대신, 제국은 아예 ‘황제직’을 경매에 부친 것이다. 권좌는 무력도 혈통도 아닌, 가장 많은 금액을 약속한 사람에게 넘어갔다. 그렇게 로마의 통치권은 공개 입찰을 거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라는 부유한 귀족 출신 정치인의 손에 낙찰됐다.

 

이 기이한 거래를 주선한 쪽은 다름 아닌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였다. 원래는 로마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정예 부대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들은 단순한 경호병을 넘어 황제의 임명과 폐위까지 좌지우지하는 권력의 심장부로 자리 잡았다. 제국의 안위를 지켜야 할 병사들이 이제는 황제 자리를 가장 비싼 값에 넘기는 중개인으로 나선 셈이었다.

 

로마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프라에토리아 근위대"
로마 황제의 신변을 보호하고 수도를 방어하는 "프라에토리아 근위대"

 

사건의 발단은 개혁 성향의 전임 황제 페르티낙스가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의 특권을 축소하려 한 데 있었다. 그는 부패와 방종으로 얼룩진 선왕 코모두스의 유산을 정비하고자 했지만, 이미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근위대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불만은 곧 폭력으로 번졌고, 결국 페르티낙스는 재위 3개월 만에 근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차례가 되자, 근위대는 전통적인 추대 방식 대신 전례 없는 선택을 감행했다. 황제직을 경매에 부친 것이다. 말 그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치권이 공개 입찰에 부쳐졌다.

 

입찰자는 두 명. 황제의 장인이자 로마 시장이던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 그리고 귀족 출신 정치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 병사 한 명당 25,000 금화를 약속하며 최고가를 제시했고, 경매는 그의 승리로 끝났다. 병사들 입장에서는 ‘가장 후한 보상’을 약속한 후보가 당연히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 새로운 황제는 시민들의 인정은커녕 비웃음만 샀다. “황제를 돈으로 샀다”는 사실은 로마 전역에 분노를 일으켰고, 곧 여러 지역 총독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 북부 군단을 거느린 세베루스 장군이었다. 그는 자신이 정당한 황제라 선언하고 군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프라에토리아 근위대는 싸움을 거부하고 율리아누스를 버렸다.

 

로마 원로원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폐위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궁전에서 결과를 기다리던 그는 저항 한 번 없이 처형당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짦은 황제로 기록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로마 역사상 가장 짦은 황제로 기록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내가 누구를 죽였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무너뜨린 것은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권위와 민심이었다. 그의 통치는 기간은 고작 66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