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노예 해방을 이끈 지도자. 에이브러햄 링컨의 이름 앞에는 늘 이런 묵직한 수식어가 따른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정치적, 역사적 업적 이면에, 젊은 시절 그가 탁월한 실력의 레슬러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오늘날 그의 기록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력이다. 링컨은 193cm에 달하는 큰 키와 20대 초반의 탄탄한 체력을 바탕으로 약 12년간 레슬링 선수로 활동하며 단 한 번의 패배만을 기록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기량은 후일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에 헌액될 정도로 출중했다.
실제로 1850년대 그가 정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젊은 시절 다져진 '강골' 이미지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분명한 매력으로 작용했다. 흔히 수염을 기른 중후한 모습으로 기억되는 링컨. 젊은 시절 맨손 격투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강인함과 상대의 허점을 간파하는 능력은, 훗날 그가 복잡한 정치 지형을 헤쳐나가는 전략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 글을 통해, 위대한 지도자 링컨의 이 독특한 이력이 그의 삶과 리더십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자 한다.
젊은 링컨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이야기는 링컨이 훗날 대통령이나 변호사가 되기 한참 전인 1831년경, 일리노이주 뉴세일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링컨의 가족(아버지 토머스 링컨, 새어머니 세라 부시 링컨 등)은 1830년 봄, 인디애나를 떠나 일리노이주 메이컨 카운티(Macon County)로 이주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고, 다음 해인 1831년 봄, 링컨의 가족은 다시 더 나은 곳을 찾아 콜스 카운티(Coles County) 쪽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한다. 이때, 22세가 되어 성인이 된 에이브러햄 링컨은 더 이상 아버지를 따라 농사일을 하며 살기보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가족과 헤어져 독립하기로 결정했고, 마침내 뉴세일럼에 정착하여 덴튼 오펏의 가게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그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청년이었다.
가게 주인 오펏은 193cm의 큰 키에 영리함까지 갖춘 젊은 링컨에게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내 점원이 이 동네 누구보다 힘도 세고 머리도 좋다"고 자랑했으며, 급기야 링컨이 마을에서 가장 세다고 큰소리쳤다. 오펏의 호언장담은 당연히 인근 클래리 그로브 정착지의 터줏대감 격인 '클래리 그로브 패거리'의 귀에 들어갔다. 이들은 거칠고 힘 자랑하기 좋아하는 젊은이들로, 스스로 지역 최강이라 믿었다.
당시 일리노이주 뉴세일럼과 같은 미국의 '변방 개척지(Frontier)'는 문명화된 동부와 달리, 이제 막 정착이 시작되어 정부의 통제나 법질서가 제대로 자리 잡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환경에서는 공식적인 법보다는 공동체 내의 평판, 그리고 무엇보다 물리적인 힘이 생존과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개인의 힘과 기량을 직접 겨루는 레슬링은 매우 흔한 일이었다. 이는 단순히 오락을 넘어 남성성을 증명하고, 공동체 내 서열을 정하며, 때로는 분쟁을 해결하는 중요한 사회적 수단으로 기능했다.
클래리 그로브 패거리에게 레슬링은 그들만의 오랜 관행이자 힘의 증명 방식이었다. 새로 온 이방인은 예외 없이 이 혹독한 시험을 거쳐야 했고, 그 중심에는 지역 최강자로 인정받던 리더, 잭 암스트롱이 있었다. 링컨과 암스트롱의 레슬링 시합은 실제로 있었던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시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사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있지만,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오펏이 링컨의 힘을 지나치게 자랑하자, 패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암스트롱이 도전을 받아들이거나 직접 제안했다는 것이다. 오펏이 10달러 내기를 걸었다는 설도 유력하다.
분명한 것은, 당시 잭 암스트롱은 훗날 '위대한 대통령'이 될 이 청년이 상당한 레슬링 실력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에이브러햄 링컨과 잭 암스트롱의 레슬링 대결
잭 암스트롱과 맞붙었을 때 링컨은 결코 만만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유명 레슬러였던 삼촌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힘쓰는 데는 이골이 났고, 9살부터 21살까지 꾸준히 레슬링 기술을 연마했다고 한다. 겉보기엔 수줍은 청년이었지만, 한번은 시합에서 이긴 뒤 관중들에게
"내게 덤빌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호기롭게 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암스트롱과의 맞대결 소식은 작은 마을 뉴세일럼을 순식간에 달아오르게 했다. 동네 챔피언과 '오펏 가게'의 멀대 같은 신참이 붙는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세기의 대결을 직접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링컨은 단판 승부의 조건으로, 서로 붙잡고 메치기만 허용하는 고전적인 방식을 제안했고, 자신감에 차 있던 암스트롱도 이를 받아들였다.
마침내 돈 내기가 오가는 요란한 분위기 속에서, 가게 근처 공터에서 역사적인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초반은 팽팽한 탐색전이었다. "둘은 잠시 서로를 경계하며 빙빙 돌았고, 잡아당기고 비틀어보았으나 쉽게 넘어뜨리진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키와 팔 길이에서 20cm 이상 앞섰던 링컨이 서서히 암스트롱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암스트롱은 그만 비겁한 반칙을 쓰고 말았다. 몰래 발을 걸어 링컨을 넘어뜨리려 한 것이다. 이 '꼼수'에 링컨은 불같이 화를 냈고, 그대로 암스트롱의 목덜미를 잡아채 '걸레짝처럼' 던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대장이 당하는 모습에 격분한 클래리 그로브 패거리가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려 하자, 링컨은 벽에 등을 딱 붙이고 조금도 물러서지 않으며 외쳤다.
"좋다! 한 놈씩 차례로 붙어주마! 정정당당하게!"
승부의 결과는 여기서 두 가지 이야기로 갈린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암스트롱이 자신의 패거리들을 가로막고는 링컨의 실력과 그 배짱에 감탄하며 스스로 패배를 인정했다는 버전이다. 그는 링컨을 "이 동네에서 가장 센 녀석"이라고 칭찬하며 악수를 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는, 훗날 링컨 자신이 "잭 암스트롱은 러시아 곰처럼 강했다. 나도 그를 메치지 못했고, 그 역시 나를 메치지 못했다"고 회상한 기록을 근거로, 결국 치열했던 두 사람의 대결이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는 설 또한 설득력 있게 전해진다.
선거 유세 중 주목받은 링컨의 레슬링 경력
잭 암스트롱과의 승부(혹은 무승부)는 링컨의 화려한 레슬링 경력의 극히 일부일 뿐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약 12년간 300번에 달하는 시합에서 단 한 번 패배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 유일한 패배는 1832년 블랙호크 전쟁 중 잠시 군 복무를 할 때 동료 병사에게 당한 것이라고 한다.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 관계자였던 밥 델린저는 1995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역대 대통령 중 레슬링을 했던 이들 가운데 단연코 링컨이 가장 거칠고 강인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니, 그의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이처럼 젊은 시절 다져진 '힘센 링컨'의 명성은 1858년, 그가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하면서 본격적으로 대중 정치 무대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해 8월 오타와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스티븐 더글러스는 링컨의 레슬링 이력을 "흥미로운 일화"로 언급하며 칭찬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동시에 "노예제 폐지를 외치는 급진적인 '흑인 공화당원'"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맹렬히 공격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오해하지 말자, 링컨은 당연히 백인이었다. 여기서 “흑인 공화당원” 이라는 표현은, 19세기 중반 미국 정치권에서 링컨처럼 노예제 폐지에 우호적인 정치인을 지칭하거나 과격한 급진주의자로 몰아붙일 때 사용한 표현이었다. 당시 링컨의 정치적 라이벌들은 노예제에 반대하는 인물을 비난할 때 “흑인과 동등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를 담아 “블랙 리퍼블리컨(Black Republican)”이라고 불렀다. 실제 피부색이나 인종과는 전혀 무관하며, 그저 정치적 입장을 깎아내리기 위한 저급한 흑색선전이었다.
결과적으로 링컨은 이 선거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2년 뒤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이때의 레슬링 일화가 신문에 다시 오르내리며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강인하고 정직한 지도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실제로 링컨의 남다른 강인함은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시카고 언론인이었던 존 록 스크립스는 1900년에 쓴 전기에서 링컨이 "거친 개척지 환경 속에서도 링컨의 힘과 민첩성, 지구력은 주변 사람들을 월등히 능가하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플레밍 역시 링컨을 '승부욕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패배했을 때는 결과에 깨끗이 승복할 줄 아는 진짜 스포츠맨'이라 평하며, 흥미롭게도 '공교롭게도, 링컨의 육체적 전성기가 지난 뒤에야 그의 위대한 정치적 리더십이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을 덧붙이기도 했다.
물론 미국 역사상 레슬링 실력을 뽐낸 대통령이 링컨만은 아니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역시 레슬링을 즐겼는데, 한 손으로 상대의 옷깃(collar)을, 다른 한 손으로는 팔꿈치(elbow)를 잡고 서서 균형을 무너뜨려 넘어뜨리는 것이 특징인 영국식 '칼라 앤 엘보' 스타일에 능했다고 전해진다. 거구의 윌리엄 태프트 전 대통령 역시 예일대 재학 시절 두 번이나 교내 레슬링 챔피언을 차지한 경력이 있다. (아쉽게도 링컨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뛰어난 운동 신경을 물려받지 못했거나 요절하여 그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수많은 레슬러 대통령들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실력자는 단연 링컨이었다는 데는 큰 이견이 없다. 이러한 그의 독보적인 업적과 상징성을 기려, 미국 레슬링 명예의 전당은 에이브러햄 링컨을 '위대한 미국인' 부문에 자랑스럽게 헌액했다. 링 위에서 상대를 압도하던 젊은 거인의 모습은, 백악관 집무실의 위대한 대통령만큼이나 오늘날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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