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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오염된 피' 사건: 가상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

OUTNUMBERED 2025. 2. 4. 07:02

당시 20대였던 나는 와우 헤비유져였다.
당시 20대였던 나는 와우 헤비유져였다.

 

 

2000년대 초반, 나는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우)에 푹 빠져 있었다. 북미 Sen'jin 서버에서 나름 유명한 길드장이자 공대장이었고, 와우 초창기부터 '불타는 성전', '리치 왕의 분노', '대격변' 확장팩까지 현실보다 와우가 더 현실감 있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가까운 친구나 가족보다 와우에서 만난 사람들과 더 많은 소통을 하고, 현실에서는 털어놓기 힘들었던 깊은 이야기들을 스스럼없이 나누곤 했다. 그 시절의 와우는 단순한 게임을 넘어 또 다른 세상이었고, 그 세상 속 내 캐릭터는 나의 또 다른 자아였다. 언젠가 나의 와우 이야기는 다른 글로 풀어내기로 하고, 오늘은 와우 세계를 뒤흔든 사건, 바로 '오염된 피'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발단: 줄구룹 던전과 '오염된 피' 디버프

줄구룹 던전
줄구룹 던전

 

 

2005년, 와우 1.7 패치로 추가된 줄구룹 레이드 던전. 그곳의 최종 보스 '학카르'는 '오염된 피'라는 기술을 사용했다. 이 디버프는 2초마다 200의 피해를 입히고, 다른 플레이어에게 전염되는 특성이 있었다. 플레이어의 기술로는 해제가 불가능했으며, 오직 학카르의 '피의 착취' 기술로만 해제할 수 있었다.

 

확산: 사냥꾼 펫과 버그

줄구룹 던전의 보즈 "학카르"
줄구룹 던전의 보즈 "학카르"

 

학카르의 "오염된 피" 라는 기술
학카르의 "오염된 피" 라는 기술

 

최초 전파자 역활을 한 "오염되 피"에 감염된 사냥꾼의 펫 늑대
최초 전파자 역활을 한 "오염되 피"에 감염된 사냥꾼의 펫 늑대

 

 

문제는 사냥꾼의 펫이 '오염된 피'에 감염되면서 발생했다. 학카르의 '피의 착취' 기술로 '오염된 피' 디버프가 해제되기도 전에 사냥꾼이 펫을 소환 해제한 것이다. 이후, 사냥꾼이 감염된 펫을 다시 마을에서 소환하면서 상황은 통제 불능에 빠졌다. 펫은 근처 유저와 NPC에게 '오염된 피' 디버프를 전염시키기 시작했다.

 

 

대혼란: 와우 세계 전역으로 확산

당시 초토화가 된 와우 세계관의 한 도시
당시 초토화가 된 와우 세계관의 한 도시

 

 

당시 플레이어의 최대 생명력은 2,000~5,000 정도였다. 2초마다 200의 피해는 치명적이었다. 특히 NPC는 죽어도 부활하지 않고, 전투 상태가 아니면 체력이 회복되는 시스템 덕분에 '보균자' 역할을 하게 됐다. 상점이나 마을을 찾은 유저들은 이 NPC에게 감염되었고, 저레벨 유저는 즉사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고레벨 유저들은 감염 사실을 모른 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오염된 피'를 전 세계로 확산시켰다. 얼라이언스 대도시 아이언포지뿐 아니라 오그리마, 스톰윈드, 언더시티 등 주요 도시들이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감염된 플레이어들이 교역로와 포탈을 통해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면서 전염병은 아제로스 전역으로 퍼졌다.

 

다양한 인간 군상

이 재앙을 대하는 유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이 재앙을 대하는 유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당시 동시 접속자 수 10만 명에 달했던 와우. 유저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죽어가는 유저를 살리려 힐을 시도하는 이들, '혼자 죽을 수 없다'며 고의로 다른 유저를 감염시키는 이들, 확산을 막기 위해 퀘스트를 방해하는 이들, 가짜 해독제를 팔아 돈을 벌려는 사기꾼들, 절망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유저들, 아무것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한 이들까지. 이 가상 세계에서 드러난 인간 군상은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결말과 여파: 역사에 기록된 사건

 

블리자드는 서버 롤백과 '오염된 피' 기술 패치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단순히 게임 내 버그로 끝나지 않았다. BBC 뉴스와 의학 저널에 가상 세계의 전염병 사례로 소개되며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오염된 피' 사건을 전염병 연구에 활용하기 위해 블리자드에 관련 통계 자료를 요청했으나, 최종적으로 블리자드가 이를 제공하지 않아 연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 사건은 실제 전염병 확산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의 양상을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게 보여준 사례로 평가받았다.

 

결론: '오염된 피' 사건, 게임을 넘어선 인간 사회의 축소판

 

지금은 와우를 떠난 지 오래됐지만, 나에게 와우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었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현실처럼 느껴졌던 또 하나의 세계였다. 몇 년 동안 동고동락한 길드원들. 단순한 동료가 아니라, 가족과도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새로운 보스를 공략하기 위해 전략을 고민하며 열띤 토론을 나누곤 했다. 때로는 의견이 충돌하고, 토론이 뜨거워지기도 했지만, 그 과정마저 즐거웠다. 레이드에서는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다시 도전했다. 아무런 진전 없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해서 쓰러지던 날들, 공략법을 찾지 못해 밤을 새우며 시도하고 또 시도했던 순간들. 하지만 그 끝에서 마침내 공략에 성공했을 때, 보이스 채팅을 가득 채우던 환호성과 벅찬 감동은 그 모든 노력을 보상해주기에 충분했다. 그 시간들은 단순한 게임의 일부가 아니라, 내 인생의 한 페이지였다. 그렇기에 '오염된 피' 사건은 단순한 게임 속 단순한 해프닝 이상의 의미로 다가왔다. 직접 겪은 사건은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깊이 감정이입하게 되었다.

 

'오염된 피' 사건은 단순한 게임 속 버그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가상 세계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현실의 전염병 확산 메커니즘과 놀랍도록 유사한 양상을 보였고, 사회적 혼란과 인간 군상의 다양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게임이라는 가상 공간이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행동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