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3부] 보나노 패밀리 (Bonanno Crime Family)

OUTNUMBERED 2025. 3. 8. 17:08

시칠리아에서 시작된 뿌리

시칠리아의 카스텔라마레 델 골포.

 
1900년대 초 시칠리아의 카스텔라마레 델 골포는 어업과 농업에 의존하는 작은 공동체였다. 이곳에서 보나노부첼라토 두 가문은 어업권, 토지, 지역 상권 등 한정된 자원을 놓고 끊임없는 다툼을 벌였다. 인구가 적었던 만큼 갈등은 곧 개인적인 감정으로 번졌고, 시칠리아 전통의 ‘벤데타’로 이어졌다. 벤데타는 가문의 명예가 훼손되면 반드시 동등한 피해를 되갚아야 한다는 원칙을 뜻한다. 이는 단순한 복수를 넘어 세대를 거치는 피의 순환을 낳곤 했다.
 
주세페 ‘페페’ 보나노는 이 격렬한 경쟁 속에서 가문의 생존을 모색했다. 그러나 부첼라토 가문과의 갈등이 심화되며 점차 불리해지던 차에 결정적 조력자가 나타났다. 주세페의 사촌 스테파노 마가디노가 이미 뉴욕으로 이주해 상당한 세력을 키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디노는 고향 출신 이민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영향력을 확장했고, 주세페에게 뉴욕행을 적극 권유하며 안전한 정착을 약속했다. 이 인맥은 보나노 가문이 시칠리아의 위기를 벗어나 새로운 땅에서 기회를 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결국 카스텔라마레의 분쟁은 유혈 사태로 번졌다. 부첼라토 가문의 공격으로 주세페를 포함한 보나노 가문의 여러 일원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가문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았다. 주세페의 동생 살바토레 보나노는 마가디노의 네트워크를 통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뉴욕행을 단행했다.
 

카스텔라마레 출신 이민자들의 주된 활동지였던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

 
브루클린 윌리엄스버그에 정착한 살바토레는 카스텔라마레 출신 이민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을 만들었다. 익숙한 문화적 연대감이 밑거름이 되어 서로를 돕고 보호하며 결속을 다졌지만, 그의 영향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칠리아를 잠시 방문한 뒤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싸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공식적으로는 지병으로 알려졌지만, 고향의 숙적들과의 갈등이 재점화되어 암살당했다는 설이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그러나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있다. 누가, 왜 그를 제거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의 부재는 조직에 리더십 공백을 안겼다. 
  
이 혼란스러운 시점에 뉴욕에서는 스테파노 마가디노가 살인 혐의로 기소됐다. 그는 현지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경쟁 세력과 충돌했고, 그 와중에 발생한 살인 사건에 연루되면서 수사망이 좁혀졌다. 결국 그는 체포를 피해 도주해야 했다. 조직 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마가디노까지 체포를 피해 잠적하자, 보나노 가문은 수장과 핵심 인물을 연달아 잃게 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니콜로 ‘콜라’ 시로가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카스텔라마레 출신으로 보나노 가문과 오랜 유대를 맺어온 시로는 냉정한 판단력과 뛰어난 조직력으로 흔들리던 단체를 안정시켰고, 보나노 패밀리는 그의 지휘 아래 체계적인 범죄 조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보나노 가문은 수장과 핵심 인물을 연달아 잃은 상황에서 니콜로 시로가 새로운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금주법: 카스텔라마레세 전쟁과 권력 재편

1920년대 초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었다.

 
미국에서 1920년대 초 시행된 금주법은 19세기 말부터 이어진 금주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음주는 사회악’이라는 청교도적 가치관이 확산되고 여성 선거권 운동 등 시민운동이 맞물리면서 술의 제조·판매·유통을 전면 금지시키는 제18차 수정헌법이 1919년에 통과되었다. 합법적인 주류 공급이 끊기자 지하 시장이 급성장했고, 그 틈을 노린 마피아 조직들이 금주법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밀주 제조와 판매, 주류 밀매를 통해 막대한 자금을 손에 넣은 마피아는 미국 범죄 세계를 좌지우지할 만큼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뉴욕 암흑가에선 두 거대 세력 간 충돌이 격화되면서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이 벌어졌다. 한쪽은 전통적 권위를 앞세운 주세페 ‘조 더 보스’ 마세리아로, 훗날 ‘제노비스 패밀리’의 전신이라 불리는 조직을 이끌었다. 반대편엔 체계적인 운영 방식을 내세운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있었다. 마란자노는 니콜로 “콜라” 시로가 노쇠함으로 인해 리더십을 잃은 ‘카스텔라마레 패밀리’를 승계하며 세력을 넓혔다. 마세리아가 지닌 구세대적 폭력성과 마란노가 추구한 조직 혁신은 정면으로 충돌했고, 밀주 시장 주도권을 둘러싼 이 갈등은 결국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두 거대 마피아 세력의 밀주 시장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은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흐름은 ‘영 터크’로 불린 젊은 마피아 세력의 배신으로 급변했다. 찰스 ‘럭키’ 루치아노를 비롯해 비토 제노비스, 프랭크 코스텔로 등은 원래 마세리아 측이었지만 그의 구태의연한 방식에 등을 돌리고 마란노와 손을 잡았다. 그들은 전쟁 장기화가 조직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판단했으며, 마란자노가 내세운 ‘현대적 마피아’ 구상에 더 큰 기회를 봤다.

 

결국 1931년 4월 15일, 이들은 주세페 ‘조 더 보스’ 마세리아를 암살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이를 통해 ‘카스텔라마레 패밀리’를 이끈 마란자노가 최종 승리자가 되는 듯 보였으나, 그의 독주 체제도 오래가진 못했다.


마란자노의 죽음과 ‘위원회(The Commission)’ 설립

카스텔라마레세 전쟁의 최종 승리자는 마란자노였다.

 
마란자노는 스스로를 "보스 중의 보스"로 선언하고, 뉴욕 마피아를 재편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권력욕과 구시대적인 방식은 “러키 루치아노”를 비롯한 ‘영 터크’로 불린 젊은 마피아들의 반발을 샀다. 결국, 루치아노는 마란자노마저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몇 달 후 그의 사무실에서 마란자노를 암살한다.
 
마란자노 사후 “러키 루치아노”는 뉴욕 마피아5대 패밀리 체제로 재편했다. 동시에 갈등을 조정하고 권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위원회(Commission)’를 창설했다. 이 새로운 구조는 예전처럼 ‘보스 오브 보스’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대신, 뉴욕 5대 마피아 패밀리협의체를 이루어 서로 간 이해관계를 조율하도록 한 혁신적 변화였다.
 

마란자노 사후 “러키 루치아노”는 뉴욕 마피아를 5대 패밀리 체제로 재편했다.

 
이때 조직을 이끌던 인물들과 후계자들의 등장에 따라, 다섯 주요 패밀리는 각각 고유한 명칭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먼저 주세페 마세리아 측 세력을 물려받은 찰스 ‘러키’ 루치아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루치아노’ 패밀리를 꾸렸고, 이후 비토 제노비스가 권력을 잡으면서 ‘제노비스 패밀리’로 불리게 되었다. 살바토레 마란자노의 영향권 아래 있던 카스텔라마레 출신 그룹은 전쟁 이후 조셉 보나노를 중심으로 재편돼 ‘보나노 패밀리’를 이루었다. 조셉 프로파치가 창립한 조직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다른 인물에게 운영권이 넘어가면서, 새 보스인 조셉 콜롬보의 이름을 따 ‘콜롬보 패밀리’라 불리기 시작했다. 빈센트 망가노가 통솔하던 집단은 알버트 아나스타시아를 거쳐 카를로 감비노에게 넘어가며 ‘감비노 패밀리’로 거듭났고, 가에타노 ‘토미’ 가글리아노의 조직은 토미 루케제가 계승한 후 ‘루케제 패밀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다섯 패밀리는 각자 영역을 나누어 맡으면서도, ‘위원회’를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협력하는 체제를 확립했고, 이를 발판 삼아 뉴욕을 넘어미국 전역으로 영향력을 넓혀 나갔다.


조제프 보나노 시대

카스텔라마레세 전쟁 직후 조셉 보나노가 자연스럽게 그 세력을 물려받았다.

 
카스텔라마레세 전쟁 직후,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뉴욕의 ‘보스 오브 보스’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의 독주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란자노가 암살된 뒤, 카스텔라마레 출신의 젊은 인물 조셉 보나노가 자연스럽게 그 세력을 물려받았다. 조셉 보나노는, 26세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명예, 전통, 품위’를 중시하는 옛 시칠리아 마피아 기풍을 이어받았다. 그는 시칠리아 카스텔라마레 출신 인물로 조직원 등용문을 제한해 높은 결속력을 유지했고, 곧 자신의 이름을 내건 보나노 패밀리를 출범시켰다.
 
보나노가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는 버팔로의 보스 스테파노 마가디노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버팔로는 뉴욕 주 북서부,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에 자리 잡은 항구 도시로, 마가디노는 이곳에서 이미 탄탄한 기반을 닦으며 미국과 캐나다 국경 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둘은 같은 고향 출신으로, 마란노 시대부터 쌓아온 친분 덕분에 막역한 사이였고, 이 네트워크를 통해 보나노 패밀리는 뉴욕 외곽은 물론 캘리포니아·애리조나·캐나다까지 세력을 뻗어 나갈 수 있었다.
 
위원회 멤버였던 조 프로파치는 당시 뉴욕 5대 패밀리 중 하나를 이끌고 있던 인물로, 그가 세운 조직은 훗날 ‘콜롬보 패밀리’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보나노와 프로파치는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두 패밀리 간 유대를 공고히 했는데, 1956년 보나노의 아들 빌이 프로파치의 조카와 결혼한 일은 두 조직의 동맹을 더욱 강화했다. 뉴욕 암흑가에선 이들을 ‘가장 폐쇄적이면서 내부 결속이 견고한’ 세력으로 꼽았다.
 
하지만 1962년 조 프로파치가 사망하면서 판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보나노가 루케시·감비노 파벌과 충돌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토미 루케시가 이끄는 루케시 패밀리카를로 감비노가 주도하는 루케시.감비노 파벌이 신흥 강자로 떠오르며, 보나노 패밀리가 보유한 보수적 조직력과 광범위한 이권을 탐탁지 않아 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보나노가 애리조나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갈등은 더 깊어졌다. 보나노가 건조하고 한적한 애리조나를 선호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건강 문제와 함께 ‘뉴욕의 소용돌이에서 잠시 벗어나거나 새로운 이권을 모색하기 위함’이라는 관측이 많았다.
 
불안이 짙어가는 가운데, 1963년 보나노가 라이벌 세력을 선제적으로 제거하려는 암살 음모를 꾸렸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뉴욕 암흑가는 큰 혼란에 빠졌다. 보나노가 루케시·감비노 파벌에 맞서 선수를 치려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계획에 가담했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던 조제프 마글리오코위원회 측과 접촉하면서 암살 시도가 고스란히 폭로됐다. 마글리오코는 조 프로파치 사후 잠시 패밀리를 물려받았던 인물로, 보나노와 함께 뉴욕의 판도를 뒤엎으려다 실패한 셈이다. 결국 마글리오코는 “보나노와 함께 토미 루케시와 카를로 감비노를 제거하려 했다”고 자백하고 위원회에 거액의 벌금을 물었다. 이 사건으로 보나노는 뉴욕 범죄 조직 전체의 견제를 받게 됐고, 그 후 1964년 10월 뉴욕에서 갑자기 사라지면서, 보나노 패밀리는 이때를 기점으로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됐다.


바나나 전쟁(Banana War)의 발발

조셉 보나노의 장남 "빌 보나노"

 
1960년대 중반, 조셉 보나노가 갑자기 잠적하자, 자연스럽게 그의 장남 빌 보나노가 후사를 물려받을 것이라는 관측이 힘을 얻었다. 1932년생인 빌은 당시 30대 초중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패밀리 내부와 위원회 측에선 “보스를 맡기엔 너무 젊다”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가스파르 디그레고리오는 이에 반발해 “아직 어린 빌이 패밀리를 쥐락펴락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새 보스 자리를 노렸다. 디그레고리오는 보나노 패밀리에서 오래 활동하며 위원회와 긴밀히 소통해 온 인물로, 상당한 영향력을 쌓아온 터였다. 위원회는 결국 디그레고리오 쪽에 손을 들어주었고, 보나노 패밀리는 빌 파벌과 디그레고리오 파벌로 양분됐다. 언론이 이 내전을 ‘바나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보나노(Bonanno)라는 이름을 풍자적으로 비튼 데서 유래했다. 두 파벌은 평화로운 협상을 시도했으나, 1966년 1월 28일 만남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면서 대화가 완전히 결렬됐다. 사상자는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양측 대립은 한층 극단으로 치달았다.
 
같은 해 5월, 잠적했던 조셉 보나노가 뉴욕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미 판도는 복잡하게 뒤얽힌 뒤였다. 협상을 주도하던 디그레고리오가 심장마비를 일으키면서 영향력이 약해지자, 위원회는 폴 시아카를 지지하고 나섰다. 폴 시아카는 보나노 패밀리 내에서 디그레고리오와 가까운 계파에 속해 있었고, 위원회가 내분을 조속히 수습하기 위해 선택한 차기 보스 후보였다. 결국 1968년, 조셉 보나노는 뉴욕 암흑가와 결별을 선언하고 애리조나로 떠났고, 빌 보나노 역시 뉴욕을 떠남으로써 장기화된 내분은 막을 내렸다. ‘바나나 전쟁’은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지만, 그 후유증이 보나노 패밀리를 오랫동안 흔들었다. 조셉 보나노의 잠적으로, 2년간의 사실상 리더십 공백 상태에, 분열로 약화된 조직은 외부로부터의 견제와 내부 갈등을 동시에 겪으며 예전만큼의 결속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결국 이 내분의 상처는 보나노 패밀리의 조직 재건에 큰 걸림돌로 작용했다.


필립 ‘러스티’ 라스텔리의 등장

필립 ‘러스티’ 라스텔리.

 
가스파르 디그레고리오가 주도한 ‘바나나 전쟁’이 끝난 뒤, 보나노 패밀리의 보스 자리는 폴 시아카가 이어받았지만 그의 리더십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조직 내부에는 디그레고리오 잔여 세력과 조셉 보나노·빌 보나노 계열 사이의 긴장감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시아카가 이를 조정하기에 역량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결국 시아카는 파벌 간 갈등과 조직원의 신뢰 부족, 위원회와의 미묘한 의견 차이 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시아카가 물러난 뒤, 1971년 나탈레 ‘조 다이아몬드’ 에볼라가 새 보스 역할을 잠시 맡았다. 에볼라는 과거부터 보나노 패밀리의 고참급 인물로, 조직 내 신망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오래 버티지 못했고, 1973년 자연사했다. 에볼라의 죽음 이후 위원회가 낙점한 차기 보스가 바로 필립 ‘러스티’ 라스텔리였다. 라스텔리는 오랫동안 보나노 패밀리에서 활동하며 범죄 수익 구조를 다각화하고, 위원회 인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력 덕분에 위원회는 1974년 2월 23일, 맨해튼 아메리카나 호텔에서 열린 회의에서 라스텔리를 보나노 패밀리의 공식 보스로 인정한다.하지만 라스텔리는 1975년 3월 6일, 공갈 혐의로 기소됐다. 당시 그는 뉴욕 지역의 소규모 상인들과 노점, 배달 업체 등을 상대로 ‘보호비’를 걷는 방식의 갈취를 주도했다는 사실이 경찰 수사망에 포착됐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결국 법정에 서게 됐다.
 
라스텔리는 결국 1975년 3월 6일 공갈(Extortion) 혐의로 기소됐고, 이듬해 해당 혐의가 인정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라스텔리가 옥중 생활을 시작하자, 권력의 공백을 틈타 카르미네 갈란테가 ‘비공식 대행 보스’로 급부상했다. 카르미네 갈란테는 보나노 패밀리 내에서도 유독 공격적인 행보를 보여온 인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세력 확장을 꾀했고, 특히 뉴욕 마약 시장, 그중에서도 헤로인 밀매를 독점하려는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는 필연적으로 다른 패밀리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위원회는 갈란테의 행보를 주시하며 깊은 우려를 표했다. 그들은 갈란테가 마피아 전체의 이익 균형을 깨뜨리고, 미국 내 헤로인 유통 구조를 독식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독주는 곧 마피아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갈란테의 공격적인 행보는 결국 제노비스 패밀리를 포함한 여러 마피아 패밀리의 심기를 건드렸고, 결국 1979년 7월 12일, 브루클린의 한 식당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식사 중 갑작스러운 총격으로 갈란테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카르미네 갈란테의 헤로인 밀매를 독점하려는 야망은 여러 패밀리의 불만을 불려왔다.

 
이 암살 사건은 보나노 패밀리가 다시금 권력 구도를 재정비하는 계기가 됐다. 라스텔리가 옥중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갈란테 제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갈란테 사후, 라스텔리 계열이 신속하게 패밀리의 통제권을 재확립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설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라스텔리의 사전 승인이 없었다면, 갈란테의 제거와 그에 따른 권력 재편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암흑가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갈란테의 죽음은 보나노 패밀리뿐 아니라 뉴욕 암흑가 전체에도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죽음은 뉴욕 마피아의 헤로인 사업에 '분점 구조'를 확립하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갈란테가 추진하던 독주 체제가 붕괴하고, 여러 패밀리 간에 헤로인 사업 이권이 재분배되면서, 헤로인 밀매는 더욱 체계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확대·발전하게 되었다. 이는 헤로인 사업이 특정 인물의 독점 아래 놓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패밀리들의 협력과 경쟁 속에서 더욱 정교하고 조직적으로 운영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각 패밀리들은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집중하여 헤로인 유통 과정을 더욱 효율적이고 은밀하게 조직할 수 있었다. 패밀리 간의 협력은 유통망을 견고하게 만들었고, 위험 분산은 조직 전체의 안정성을 높였다. 물론, 협력 속에서도 끊임없는 경쟁은 존재했다. 각 패밀리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기 위해 암묵적인 경쟁을 벌였고, 이는 헤로인 시장의 역동성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도니 브래스코 사건

도니 브래스코 사건의 주인공인 FBI 요원 "조지프 프스토네"

 
1976년 9월, FBI 요원 조지프 피스토네는 '도니 브래스코'라는 가명으로 보나노 패밀리에 잠입했다. 이 작전은 마피아 조직 내부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한 FBI의 극비 작전의 일환이었다. 초기 목표는 6개월간의 잠입이었으나, 피스토네는 놀라운 위장술과 적응력으로 조직원들의 신뢰를 완벽하게 얻어내며 잠입 기간을 수년으로 연장할 수 있었다.피스토네는 처음엔 조직원 앤서니 미라를 통해 보나노 패밀리에 발을 들였다. 미라는 보나노 패밀리 소속의 '솔저'급 구성원으로, 주로 사기·공갈 등으로 돈을 벌던 인물이다. 당시 경찰은 보나노 패밀리의 보스였던 필립 ‘러스티’ 라스텔리가 뉴욕 지역 상인들로부터 갈취 사건을 포착해 수사에 착수했고, 미라도 여기에 연루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 과정에서 별다른 보석이나 합의를 얻지 못한 그는 결국 수감됐는데, 내부 자금 사정과 정치력이 부족해 빠른 석방이 어려웠다는 후문이다. 미라가 교도소로 들어간 뒤, 피스토네는 미라와 친분이 깊었던 벤자민 ‘레프티’ 루지에로의 휘하로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루지에로는 조직 내에서 꽤 오래 활동해온 베테랑 멤버로, 피스토네의 ‘스승’ 역할을 자처하며 마피아 세계의 규율과 일거리를 익히게 했다.
 
1979년 갈란테가 암살되면서 보나노 패밀리 내부 세력 판도에 변동이 일어났다.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라스텔리가 보나노 패밀리의 보스였지만, 옥중에 있었던 라스텔리가 패밀리를 온전히 통제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때 도미닉 나폴리타노라는 인물이 보나노 패밀리에서의 옥중 라스텔리의 후견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나폴리타노는 옥중 라스텔리 체제를 지지하는 핵심 인물이자,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Capo, 중간 간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피스토네를 신뢰하며 점차 중요한 사업과 의사 결정에 참여시켰다.
 
그 무렵 패밀리 내부에서는 옥중에서도 패밀리를 장악하려는 라스텔리를 중심으로, 그의 충성파인 도미닉 나폴리타노와 조제프 마시노가 확고한 지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패밀리 내부에는 이들에 대한 반발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알폰세 인델리카토, 도미닉 트린체라, 필립 지아코네, 일명 '세 카포'는 자신들의 야망을 숨기지 않고 라스텔리 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들은 모두 패밀리 내에서 영향력 있는 카포 계급에 속해 있었으며, 라스텔리의 옥중 통치와 그의 측근들이 행사하는 막강한 권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세 카포'는 단순히 불만을 표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라스텔리와 그의 핵심 측근들을 제거하고 자신들이 패밀리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쿠데타'를 은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1981년 5월 5일, 나폴리타노와 마시노는 쿠데타 소문을 접하고 미리 선수를 쳐 ‘세 카포’를 미팅 장소로 유인해 사살했다. 이를 ‘세 카포 살인 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장에서 살아남아 달아난 인물이 프랭크 ‘컬리’ 리노였다. 리노는 인델리카토 계열로 분류되는 또 다른 솔저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진 뒤 복수를 결의한 생존자들과 은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조직 내부를 극심한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희생자 중 한 명인 인델리카토의 아들 브루노가 나폴리타노 측에 원한을 품게 되자, 나폴리타노는 FBI 잠입 요원피스토네에게 그를 암살하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피스토네가 이 임무를 수행했다면 정식 조직원(made man)으로 승격될 예정이었지만, 1981년 7월 FBI가 작전을 전격 중단하면서 암살 지시는 취소됐다. 이 잠입 작전은 뉴욕 암흑가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보나노 패밀리를 포함해 여러 마피아 조직원들이 줄줄이 기소와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나폴리타노와 피스토네를 받아들였던 앤서니 미라 등 관련 인사들은 ‘배신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이어 살해됐고, 보나노 패밀리는 ‘도니 브래스코 사건’으로 위원회에서 제명당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옥중의 라스텔리는 패밀리를 재정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을 들였지만, ‘도니 브래스코 사건’으로 위원회에서 제명당한 뒤라 내부 통제가 쉽지 않았다. 주요 간부들의 구속·암살이 잇따르면서 조직은 세는 심각하게 약화됐고, 다른 패밀리와의 신뢰관계도 무너진 상태였다. 결국 보나노 패밀리가 옛 위상을 되찾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게 대다수의 평가였다.
 
도니 브래스코 사건은 마피아 세계에 뿌리 깊은 불신과 배신의 씨앗을 뿌렸다. FBI 요원 조지프 피스토네의 잠입은 마피아 조직이 얼마나 취약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내부에서도 얼마든지 배신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안감은 패밀리 간의 협력을 무너뜨렸고, 서로를 견제하며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위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피아 조직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위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위원회에 속한 보나노 패밀리의 몰락은 정보력과 통제력에 대한 의문을 증폭시켰고, 이는 위원회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졌다. 내부 규율 강화 시도가 있었지만, 이미 뿌리 깊게 박힌 불신과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도니 브래스코 사건은 마피아 세계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조직 내부의 균열, 수사 당국의 압박, 위원회의 권위 실추 등 모든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마피아 조직들을 쇠퇴의 길로 이끌었다.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암흑가에는 불안과 혼란만이 가득했다.


조제프 마시노 체제  

필립 라스텔리 사후 "조세프 마시노"가 새로운 보나노 패밀리의 보스로 추대되었다.

 
1991년, 옥중에 있던 필립 ‘러스티’ 라스텔리가 사망하자,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들을 소집한 살바토레 비탈레조제프 마시노를 새 보스로 추대했다. 살바토레 비탈레는 라스텔리의 오랜 측근이자 조직의 언더보스였다. 비탈레는 도니 브래스코 사건으로 패밀리가 혼란에 빠졌을 때, 마시노가 도미닉 나폴리타노를 처리하고 뒷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능력과 리더십을 인상 깊게 보았다. 특히, 조직 내부의 배신자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위원회의 압박을 효과적으로 해결하는 마시노의 결단력과 냉철함은 비탈레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한, 마시노는 라스텔리의 신임을 받는 충성스러운 인물이었고, 비탈레와 오랫동안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다. 이러한 이유로 비탈레는 마시노가 패밀리를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는 최적의 인물이라고 판단하고, 그를 새 보스로 추대했다.
 
젊은 리더가 된 마시노는 패밀리의 실권을 최대한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과거와는 다른 은밀하고 치밀한 운영 방식을 도입했다. 먼저 조직원들이 모이던 소셜클럽을 전부 폐쇄하고, 다른 패밀리와의 공동 사업에도 극도로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시시각각 터져 나오는 경찰 수사와 내부 배신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또한 마시노는 조직의 이름을 “보나노 패밀리”에서 '마시노 패밀리'로 변경하여 자신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자 했다. 이는 단순한 이름 변경을 넘어, 조직을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아울러 부하들에게는 “보스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법정 증언이나 도청에서 리더의 실명이 거론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한 고도의 보안 수단이었다제노비스 패밀리빈센트 ‘더 친’ 지간테가 자기 이름 대신 턱을 가리키게 했던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조직원 선발 절차도 더욱 까다롭게 바꿨다. 갑작스러운 임명이나 족보가 불투명한 인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최소 8년간의 ‘수습 기간’을 두었고, 가급적이면 조직원의 아들이나 친척을 데려와 “피로 맺어진 충성”을 맹세 하도록 했다.
 
마시노의 이런 철저한 규율은 큰 자산이 됐다. 조직원 수는 약 80명 선에서 110명까지 늘어났다. 1990년대 후반에는 존 고티 (감비노 패밀리 보스)의 중재로 위원회에 복귀하며 ‘5대 패밀리’ 지위를 되찾았고, 당시 다른 패밀리 보스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면서 마시노는 사실상 뉴욕에서 유일하게 현직으로 활동하던 보스가 됐다. FBI조차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보스”라고 부를 만큼 영향력이 막강해졌고, 보나노 패밀리는 한 때나마 제노비스 패밀리에 버금가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몰락과 대규모 배신, 그리고 조제프 마시노의 전향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였던 "리처드 칸타렐라"는 정부에 투항하여 내부 고발자가 되었다.

 
2000년대 초, 보나노 패밀리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균열을 맞이했다. 금융 사기 사건을 추적하던 국세청(IRS) 소속 회계 감사관들은 사업가 배리 와인버그가 10년에 걸쳐 수백만 달러의 소득을 신고 누락한 사실을 포착했다. 문제는 와인버그가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 리처드 칸타렐라와 동업 관계였다는 점이었다. 탈세 사실이 드러나자 와인버그는 처벌을 피하기 위해 FBI에 협조하기로 결정했다. 그의 동업자였던 아우구스티노 스코차리 역시 내부고발자로 돌아섰다. 그 역시 FBI에 협조하는 대가로 감형을 약속 받고 칸타렐라 조직의 범죄 행위를 낱낱이 폭로했다. 칸타렐라 조직은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 리처드 칸타렐라가 이끄는 보나노 패밀리의 하부 조직으로, 불법 도박, 고리대금, 갈취 등 각종 범죄에 연루되어 있었다. 스코차리의 폭로는 칸타렐라 조직을 넘어 보나노 패밀리 전체를 뒤흔들었다.
 
2002년 10월, FBI는 칸타렐라를 포함한 보나노 패밀리 조직원 21명을 리코법(RICO)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여기서 RICO 법 (조직범죄 및 부패방지법)은 조직범죄의 배후 세력, 즉 직접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조직의 운영에 관여하거나 지시를 내린 인물까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법률이었다. 기소된 조직원 중에는 보나노 패밀리의 카포, 프랭크 코파도 있었다. 조직 내 핵심 간부인 '카포'가 정부에 투항하여 내부 고발자가 된 것은 조직에 엄청난 균열을 일으키는 사건이었다. 심지어 앞서 기소되었던 보스 대행 리차드 칸타렐라와, 보나노 패밀리의 또 다른 핵심 조직원인 조지프 다미코마저 FBI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배신자는 없다"는 마피아의 신성한 규칙은 깨졌고, 보나노 패밀리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휩싸였다.
 
이 사건은 당시 보스 조제프 마시노에게도 치명타였다. 2003년 1월, 마시노는 자신을 보나노 패밀리의 보스로 추대한 전 언더보스 살바토레 비탈레, 조직원 프랭크 리노, 대니얼 몽젤리 등과 함께 리코법 위반 및 살인 공모 혐의로 기소되었다. 특히 1981년 도미닉 나폴리타노 살해 지시 혐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보석마저 거부당한 마시노를 대신하여 빈센트 바시아노(패밀리의 카포)임시 보스 대행을 맡았다. 그러나 배신의 행렬은 멈추지 않았다. 제임스 타르타글리오네, 살바토레 비탈레, 프랭크 리노, 두에인 라이젠하이머 등 핵심 조직원들이 줄줄이 정부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조직을 보스로 마시노를 추대했던 언더보스 비탈레는 마시노가 자신의 친척을 살해하라고 지시했던 사실을 알고 격분하여 완전히 등을 돌렸다. 비탈레의 친척 살해 사건은 마시노가 권력 유지를 위해 저지른 잔혹한 범죄 중 하나였다. 
 
배신의 연쇄 속에서 마시노는 2004년 7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살인, 공갈, 고리대금 등 11개 혐의 모두 인정되었다. 사형 선고가 유력한 상황에서 그는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정부 협조였다. 뉴욕 5대 패밀리 역사상 패밀리의 보스가 정부에 협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의 선택은 마피아 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고, 보나노 패밀리의 몰락을 확정 짓는 결정타가 되었다.


몰락의 그림자

2004년 7월, 뉴욕 동부 지방 연방 검찰청은 지난 4년간 보나노 패밀리 조직원 7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검찰은 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이어갔고, 70대 이상 고령 조직원 7명을 포함한 12명이 불법 고액 도박 사업 운영 혐의로 기소되었다. 여기에는 조직의 핵심 간부이자 콘실리에리인 앤서니 라비토도 포함되었다. 앤서니 라비토는 보나노 패밀리에서 '콘실리에리(Consigliere)'라는 지위로, 조직의 고문 역할을 하는 중요 간부였다. 조직내에 문제가 발생하였을 경우,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조언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마시노가 구속된후 "빈센트 바시아노" 가 보스대행을 맡았다.

 
마시노가 구속된 후, 빈센트 바시아노가 보스 대행을 맡았지만, 그 역시 2006년 살인 미수와 불법 도박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어진 재판에서 2007년 8월 1일 프랭크 산토로 살해 혐의까지 유죄 판결을 받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바시아노가 수감되자 살바토레 몬타냐가 대행 보스 자리를 이어받았다. 몬타냐 곁엔 니콜라스 산토라(대행 언더보스), 앤서니 라비토(콘실리에리) 등 아직 체포되지 않은 보나노 패밀리의 핵심 간부들이 그의 측근에 포진해 있었다. 그러나 2007년 2월, 이들 역시 리코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몬타냐는 2009년 캐나다로 추방되었고, 빈센트 바달라멘티가 라는 인물이 보나노 조직을 잠시 이끌었다. 


쇠퇴의 가속화

2013년, 수감 중이던 마이클 만쿠소가  보나노 패밀리의 공식 보스로 지명되었다. 마피아 조직이 수감된 인물을 보스로 지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수감중이었던 만쿠소의 보스 지명은 조직 내부의 결속을 다지고, 외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풀이된다. 실제론 마이클 만쿠소를 대신해 언더보스 토머스 디피오레가 보스 대행 업무를 맡았지만, 2014년 토머스 디피오레 역시 체포되어 21개월 형을 선고받자 조제프 카마라노 주니어가 뒤를 이었다.
 
2016년 말, FBI는 보나노 패밀리의 핵심 간부들이 카마라노 주니어의 새 지위를 축하하는 식사 자리를 가진 사실을 포착했다. 이는 조직이 여전히 활동 중이며, 내부적으로 새로운 리더십을 구축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 2015년 9월에는 보나노 패밀리의 준조직원 찰스 센타로가 돈 세탁 혐의로 33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보나노 패밀리가 여전히 불법적인 자금 세탁 활동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2017년 11월, 보나노와 갬비노 패밀리 조직원들이 또다시 마약, 고리대금, 무기 판매 등으로 체포되었다. 비슷한 시기, 보나노 패밀리는 캐나다에서 '신규 조직원 임명식'까지 열었는데, 이는 경찰 비밀요원이 전부 녹화한 것이 드러나 추가 기소로 이어졌다. 보나노 패밀리는 신규 조직원을 충원하며 세력을 확장하려 했지만, 결국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했다.
 
2018년 1월, 보나노 패밀리 조직원 8명이 공갈, 폭행, 살인 모의 등 혐의로 무더기로 체포되었다. 행동대장 조제프 카마라노 주니어와 콘실리에리 존 잔코키오까지 포함되었을 정도로 조직의 핵심 간부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이는 보나노 패밀리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으며, 조직 내부의 불안정성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나노 패밀리의 현재 상황

2022년 기준으로 보나노 패밀리의 공식 보스는 여전히 마이클 만쿠소다. 그는 조건부 석방 기간 중 마피아와 접촉한 혐의로 2022년 3월 다시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8월 16일, 뉴욕 동부 지방 연방 검찰청은 보나노·제노비스 패밀리 조직원 9명 그리고 부패 혐의를 받는 뉴욕 경찰관 헥터 로사리오를 공갈·도박·돈세탁·사법 방해 혐의로 기소했다. 이들은 공동 운영하는 불법 도박장에서 올린 수익을 세탁했고, 로사리오는 경쟁 도박장을 단속하게끔 경찰을 움직여준 대가로 뇌물을 받은 혐의를 받는다. 결국 그는 경찰에서 해고됐다.
 
2023년 9월 14일, 한때 ‘마지막 돈(The Last Don)’으로 불리며 조직 재건을 이끌었던 전 보스 조제프 마시노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2024년 8월 26일, 정부 측 정보원으로 전향했던 보나노 패밀리의 전직 카포였던 프랭크 코파가 정부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따라 플로리다주에서 가명 생활 중 82세로 숨을 거뒀다. 11월 7일에는 보나노 패밀리 조직원 앤서니 프라스코네 등 5명이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불법 도박 혐의로 체포됐는데, 이들은 불법 온라인 스포츠 베팅 사업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보나노 패밀리는 미국 마피아 역사의 굵직한 사건마다 중심에 서 있었고, 지금도 완전히 해체되지 않고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과 교활한 암투, 그리고 거듭된 배신이 뒤얽힌 이들의 이야기는, 현대 범죄사의 어두운 이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이글은 "[4부] 감비노 패밀리" 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