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맥베인 – 검과 싸움에 미친 광인
17세기 말 스코틀랜드. 전쟁과 빈곤, 정치적인 혼란이 뒤엉킨 격동의 시기.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도널드 맥베인은 단 한 자루의 검에 인생을 걸었다. 군인, 검술 교관, 선술집 주인, 그리고 매춘업자—그의 기묘한 이력은 이 시대의 잔혹한 풍경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교육보다는 생존을 먼저 배웠고, 1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립 스코틀랜드 군대에 입대했다. 당시 유럽은 격변의 시기였다. 발트해의 패권을 두고 스웨덴과 러시아가 맞붙은 대북방 전쟁,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과 오스트리아가 충돌한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그리고 연대상으로는 뒤에 이어지지만 해상 무역권을 두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벌인 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까지, 이러한 소용돌이 한가운데에서 맥베인은 유럽 각지의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쟁의 진흙탕 속에서 많은 동료들이 차가운 총알에 쓰러지는 광경을 목격하며 그가 터득한 유일한 교훈은 단순했다.
"전쟁터에선 귀족과 거지가 모두 같은 피를 흘린다. 차이가 있다면 오직 검을 쥔 손이 얼마나 빨리 움직이느냐 뿐이다."
1706년, 벨기에 평원에서 벌어진 라미예 전투에서 그는 왼쪽 허벅지에 깊게 박힌 창을 스스로 도려낸 뒤, 적 세 명의 목을 베어냈다. 그의 공로에 돌아온 보상은 고작 은화 20닢. 그 이후에도 멕베인은 크고 작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지만, 그의 긴 군 생활동안 남은 건 깊은 상처 뿐이었다.
퇴역 후, 거리의 싸움꾼으로
퇴역 후에도 맥베인의 귓가에는 여전히 전우들의 시체 위로 울려 퍼지던 총성과 창칼 소리가 맴돌았다.
“전쟁은 인간을 가축으로 만든다," 그는 훗날 기록했다. "내가 살아남은 건 동료를 밟고 일어섰기 때문일 뿐이다."
그는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부대 내에서는 늘 싸움이 벌어졌고, 병영 안팎에서 일어나는 분쟁에서도 그는 늘 중심에 있었다. 주먹과 검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잦았고, 점차 그는 전장 뿐 아니라 거리에서도 악명 높은 싸움꾼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18세기 영국의 결투 문화
18세기 초 영국은 결투 문화의 전성기를 맞았다. 1707년 연합법 체결 직후의 혼란 속에선 법원보다 골목의 법이 더 권위 있었다. 당시 결투는 단순한 명예의 대결을 넘어 도박, 그리고 많은 이권이 얽인 하나의 복잡한 산업이었다. 하층민은 생존을 위해 골목에서 결투를 벌였고, 귀족들은 32가지 엄격한 규칙에 따라 공식 결투장에서 혈투를 연출했다. 여기서 ‘32가지 규칙’이란 실제로 1777년 아일랜드에서 제정된 결투 규약, 즉 The Code Duello를 가리키며, 결투의 절차와 예의를 정리한 일종의 규범집이다. 귀족 사회에서는 이 규칙을 따라 결투가 진행되었으며, 결투를 무질서한 폭력이 아닌 ‘명예의 싸움’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청중들은 결투의 행방에 돈을 걸었다. 그리고 결투장에는 막대한 돈이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결투 청부업자, 맥베인
맥베인은 싸움을 즐겼고 결투는 그에게는 최적의 환경을 조성했다. 그는 영국에서 이름난 결투 청부업자였다. 그의 결투 청부 비용은 상대의 계급에 따라 달랐다. 그는 평민과의 결투에는 5실링(오늘날 돈으로 대략 5만원 상당)을 받았고, 귀족과는 1기니(약 15만 원), 성직자와의 결투에는 신성 모독에 대한 추가 비용까지 포함해 그보다도 비싼 2기니(20만 원 이상)의 대가를 청했다. 기록에 따르면 멕베인은 셀 수도 없는 결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기록은 1712년 4월, 글래스고의 '블랙 하운드' 선술집에서 벌어진 공개 결투다. 맥베인은 당시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네 명의 건달과 맞붙었고, 싸움은 차례대로 진행되었다. 관중들은 싸움에 300파운드를 걸었고, 선술집은 말 그대로 피로 얼룩진 난장판이 되었다. 첫 번째 상대의 손목 힘줄을 끊은 그는, 복부를 찔러 창자를 끄집어낸 후 두번째 상대를 응시했다. 두 번째 상대는 그 장면에 움찔했지만, 맥베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앞차기로 무릎을 꺾고, 충격에 손에서 놓친 칼을 발로 걷어차 멀리 날린 뒤, 맨손으로 목을 꺾어 쓰러뜨렸다. 세 번째 상대는 빠른 몸놀림으로 칼을 휘둘렀지만, 맥베인은 일부러 칼날을 피하지 않고 왼팔로 그대로 받아내며 거리를 좁혔다. 그는 왼팔에 깊은 상처를 입고도, 칼자루로 눈을 찔러 세번째 상대를 제압했다. 마지막 상대는 등 뒤에서 기습을 시도했지만, 맥베인은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에 비친 형상을 보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칼끝은 턱을 꿰뚫고 목덜미를 그으며 싸움에 종지부를 찍었다. 결투가 끝났을 때, 바닥에는 피가 고였고, 살아남은 자는 멕베인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귀족 여성들은 향수를 뿌리며 구역질을 했고, 도박사들은 환호와 절망이 뒤섞인 함성을 질렀다.
맥베인의 전투 방식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기술은 철저히 실전에 기반했고, 거칠고 잔혹했지만 무엇보다도 효과적이었다. 귀족들은 그의 투박한 몸놀림을 비웃었지만, 그의 압도적인 승률은 그 모든 조롱을 잠재웠다. 맥베인은 생애 100번이 넘는 결투에서 약 89%를 치명적인 부상 없이 승리로 장식했다. 그에겐 싸움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를 쟁취하여 끝까지 살아남는 데만 의미가 있었다.
전장에서의 경험과 거리에서의 싸움을 통해 갈고 닦은 그의 검술은 실제로 수많은 부상과 피의 대가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총상, 무수한 칼날 상처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그는 60대의 나이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결투의 길을 걸었다. 다른 이들이 노년의 안식을 찾을 무렵, 그는 상금을 걸고 젊은 도전자들과 맞서 싸웠다.
검술 학교 겸 선술집 '검과 술통 (Sword & Barrel)'
단순한 싸움꾼이었다면 금방 잊혔을 것이다. 그러나 맥베인은 자신만의 검술을 체계화한 실전가였다. 그는 거리의 검객들과 달리 체계적인 훈련과 이론을 중시했으며, 결국 직접 검술학교를 설립해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1720년, 에든버러 시내에 '검과 술통(Sword & Barrel)' 간판을 걸었다. 표면적으론 검술 도장이었으나, 지하실에선 위스키 거래와 매춘업이 이뤄졌다. 1층 도장에서는 귀족 자제들이 1시간에 3기니를 지불하고 세련된 펜싱을 배우고, 지하에서는 퇴역 군인들이 위스키 밀매와 매춘업으로 생계를 이었다.
경찰 기록에 따르면, 그는 1723년부터 1725년까지 17차례 유흥업소 단속에 걸렸으나, 매번 제자를 앞세워 결투로 위협해 기소를 무마했다. 경찰 기록부에는 1723년부터 1725년 사이 "맥베인의 지하실에서 적발된 위스키 120갤론, 불법 총기 7정"이라는 내용이 무려 17회나 반복 기재되어 있다. 도덕적 잣대로 보자면 군인으로서 부적절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지만, 당시 병사들의 현실을 감안하면 이는 생존 전략이었다. 국가로부터 안정적인 급여나 복지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대, 병사들은 부대에서 돌아온 뒤 각자의 방식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맥베인은 술과 성을 제공하며 돈을 벌었고, 그 수입으로 검술학교를 유지했다.
맥베인은 제자들에게 관대한 스승이 아니었다. 그는 혹독한 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제자들에게 검을 쥐는 법부터 시작해 실전에서의 움직임, 심리전, 거리의 생존 전략까지 철저하게 교육했다. 특히, 그가 직접 고안한 실제 전투 상황을 가정한 시나리오형 훈련은, 제자들의 반사 신경과 상황 대응력을 극대화시켰다. 그의 제자들은 귀족 청년부터 퇴역 군인, 심지어 범죄자 출신의 무술 지망생까지 폭넓게 분포했다. 교육 장소는 언제나 그의 도장이었지만, 때로는 실제 거리 싸움을 '수업'이라는 명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기이한 복합 공간은 맥베인의 냉철한 실용주의 철학을 응축한 곳이었다. 도장 벽에는 '검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인다'라는 살벌한 격언이 걸려 있었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명예는 위층에 남겨두고 내려가라'는 냉소적인 낙서가 새겨져 있었다.
삶과 검의 기록: 맥베인의 집필 활동
그는 자신이 걸어온 피의 여정을 돌아보며 《The Expert Swordsman’s Companion》를 집필했다. 이 책은 단순한 무술 교본이 아니다. 전쟁터와 거리에서 살아남은 한 사내의 철학과 생존 경험이 응축된, 회고록에 가까운 기록이었다. 그는 검을 단순한 무기가 아닌, 정체성과 생존, 명예와 자유의 상징이라 정의했다. 실전에서 체득한 그의 싸움과 생존에 대한 통찰은, 책 곳곳에 구체적으로 녹아 있다. 예를 들어보자면, 14장 ‘밤거리에서의 생존법’에서는 “창녀가 손님을 응대할 시, 방 침대 밑에 항상 단검을 두라”는 조언이 등장하고, 9장 ‘술집 난투’에서는 테이블 다리를 걷어차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요령을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칼은 생각의 연장이다. 머릿속이 흐리면 칼끝도 흔들린다.”
쇠퇴와 말년
1730년대, 그의 도장은 경쟁자들에게 밀려난다. 신흥 검술가들이 "과학적 펜싱"을 외치는 시대에 맥베인의 야생적 스타일은 구시대 유물로 취급 받았다. 많은 제자들이 등을 돌렸고, 도장은 곧 경영난에 빠졌다. 1738년 11월, 에든버러 법원은 '검과 술통'의 파산을 공식 공고했다. 채권자 명단에는 양조업자, 무기상, 전직 창녀 23명의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의 선술집은 결국 문을 닫았고, 150파운드의 부채와 함께 보관 중이던 검 47자루도 압수되었다. 말년의 그는 에든버러 빈민가에서 제자들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생을 마감했다. 60세가 되던 해, 그는 한 제자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새 시대는 나의 피를 마시고 자라난다.”
유산과 평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년 뒤,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가공할만한 전투력은 훗날 역사가들을 놀라게 했다. 전투 일지에는, 맥베인의 제자 12명이 “멧돌찌르기 3단 변형”이라는 기묘한 기술로 영국군 창병대를 돌파하며 270미터를 진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모두 전사했지만, 끝까지 “맥베인 만세!”를 외쳤다고 전해진다.
사회학자 모이라 캠벨은 맥베인의 생애를 ‘폭력의 자본화’ 모델로 분석하며, 그의 행적을 단순한 검술가의 삶이 아닌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조명한다. 그녀는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 검술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신분 상승의 강력한 도구였다고 강조한다. 특히, 맥베인은 당시 만연했던 폭력을 개인의 자산으로 전환해 부를 축적하고 신분 상승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피를 산업화한 선구자’로 평가된다. 이는 그가 폭력을 통해 축적한 ‘자본’을 제자 양성, 도박 등 다양한 활동에 투자하여 새로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는 기반으로 삼았음을 의미한다. 결국 맥베인은 당시 불안정한 사회 구조를 활용해 자신의 폭력적 능력을 극대화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경제적 성공을 거둔 인물로 해석할 수 있다.
글을 마치며
도널드 맥베인은 영웅도, 성인도 아니었다. 그는 빈곤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대, 오직 검 하나에 의지하여 삶의 역경을 헤쳐나간 인물이다. 그의 삶은 단순한 선악 구분을 넘어, 당시 시대가 만들어낸 어두운 자화상과도 같았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그의 파란만장한 생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1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미야모토 무사시
(2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도널드 맥베인
(3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척준경
(4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슈발리에
(완)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줄리 도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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