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준경, 고려 최강의 무신
태생과 어린 시절
척준경은 12세기 고려, 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지방 관청의 실무를 맡았던 향리 출신이었으나, 이름에 비해 살림은 넉넉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보다는 몸으로 부딪히는 무예에 더 마음이 끌렸고, 척박한 환경은 자연스레 그를 검과 창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거리의 무뢰배들과 어울리며 싸움과 몸 쓰는 법을 익혔다. 반복되는 실전은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위기 대처 능력과 생존 감각을 키우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검과 창을 다루는 기본기는 주변 싸움꾼들 사이에서 터득한 것이었고, 강인한 체력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졌다. 척준경에게 무예는 출세나 과시를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수단이었다. 그는 오직 자신의 두 팔과 검 하나로 운명을 개척해야 했다. 그렇게 이름 없던 곡산의 한 청년은 검 한 자루를 들고 세상에 나왔고, 이것이 훗날 전장을 공포로 물들일 '고려 최강검'의 시작이었다.
관료가 되다
척준경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계림공 왕희의 저택에 종자로 들어가면서였다. 계림공 왕희는 고려 제11대 왕 문종의 셋째 아들로, 왕위 계승 서열에서 보면 당시에는 직접적인 1순위 계승자는 아니었지만, 왕실 내부에서 유력한 계승 후보군 중 하나였다. 실제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엄밀한 장자 상속제가 아닌, 왕실 내부의 정치력과 지지 세력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왕희는 왕자 신분으로 지방 통치와 군사 경험을 쌓은 인물로 잠재적인 왕위 후보로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다. 이름 없는 지방 청년이었던 척준경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 왕족의 가문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안에서 성실함과 무예 감각을 인정받았다. 종자 신분으로 왕희를 수행하던 시절, 척준경은 주인의 사냥이나 외출을 수행하며 가까이에서 귀족 문화를 접하고 궁중 예법을 익힐 기회를 가졌다. 이 시기의 경험은 단지 하인이 아니라, 후일 관료와 무장으로 성장할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 왕희가 숙종으로 즉위하자, 척준경은 과거의 인연을 잊지 않은 왕의 배려로 중앙 정계에 진입하게 된다. 숙종은 그를 추밀원의 하급 관리인 '별가'로 임명했다. 별가는 정식 관직은 아니었지만, 왕실의 기밀 업무와 군사 전달 등을 수행하는 직책으로, 궁중 내부와 외부 군사 정보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는 단순한 관직 부여가 아니었다. 정치의 변두리에서 군사 행정의 문을 열어준 이 발탁은 훗날 그가 실전 전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첫걸음이었다. 이 젊은 청년에게 주어진 이 기회는, 이는 단순한 관직 부여에 그치지 않았다. 그가 무인의 길로 첫 발을 내딛는 실질적인 출발점이었고, 이후 고려 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서사의 시작이었다.
첫 전투: 전설의 서막
1104년, 동여진 세력이 고려의 북방 국경을 넘어 정주성을 급습하며 침공을 감행했다. 당시 고려군은 임간 장군의 지휘 아래 급히 방어에 나섰으나, 여진군의 맹렬한 공세에 밀려 패전 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던 중, 별가라는 하급 관직에 불과했던 척준경이 스스로 전투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별가는 본래 군사적 지휘권이 없는 행정 보조 역할에 가까운 신분이었지만, 척준경은 자신의 무예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전투에 임하려는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총사령관 임간에게 직접 다가가 말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고, 무기까지 청해 전장으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임간은 그의 대담한 요청을 받아들였고, 척준경은 곧장 전투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척준경의 행동은 단순히 대담함을 넘어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는 단신으로 여진군의 진영을 향해 돌진하며 적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과감한 돌격은 적군과 아군 모두를 경악하게 했고, 그는 여진군의 지휘관 중 한 명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이 결정적인 일격으로 여진군의 사기는 크게 흔들렸고,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척준경은 포로로 잡혀 있던 고려군 병사 두 명을 구출해 안전하게 후방으로 데려왔다. 그의 단독 행동은 전투의 흐름을 단번에 뒤바꿨다. 여진군의 진격은 멈췄고, 퇴각을 거듭하던 고려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해 결국 정주성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고려 군사 역사에서 매우 이례적인 사례로 남았다. 하급자의 돌발적인 행동이 전황을 뒤바꾼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척준경은 이 전투를 통해 단순한 별가가 아닌, 전장에서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뛰어난 무인임을 증명했다. 그의 이름은 처음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영웅적인 활약에도 불구하고, 군율을 어긴 행동으로 인해 전투 후 일시적으로 옥에 갇히는 곤경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척준경의 용맹과 전투 능력은 윤관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여진 정벌
1107년, 북방 여진족의 끊임없는 침입과 도발로 국경 지대의 불안이 극에 달하자, 고려 제16대 왕 예종은 마침내 대규모 토벌 작전이라는 칼을 빼 들기로 결심한다. 이 중대한 임무를 이끌 총사령관, 즉 대원수로는 이전부터 여진 정벌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해 온 문신 윤관이 임명되었다.
윤관은 예종의 전폭적인 신임 아래, 고려의 군사 체제를 전면적으로 재편하며 정예군 창설에 나섰다. 그는 여진 기병에 맞설 새로운 형태의 부대를 구상했고, 이를 바탕으로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으로 이루어진 항마군을 하나로 통합한 '별무반'을 조직한다. 국가적 역량이 총동원된 이 군대는 무려 17만 명 규모의 정규 전투 병력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는 단순히 병력을 늘리는 차원을 넘어, 기존 고려 군사 체제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대담하고 혁신적인 도전이었다. 곧이어 펼쳐질 여진 정벌은 이 새로운 군대의 실전 운용 능력을 가늠하는 시험장이자, 고려의 안보 향방을 가를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척준경은 이 원정군에서 중군 소속의 하급 실무 장교, 즉 녹사라는 낮은 직책으로 참전하게 된다.
석성 전투
별무반 창설 이후, 고려는 마침내 오랜 숙원이던 여진 정벌에 첫발을 내디뎠다. 북방 국경을 안정시키고 동북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초기 단계에서 별무반의 실전 능력을 점검하고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으며, 척준경 역시 중군 소속의 녹사로 이 역사적인 원정에 합류했다. 비록 행정 실무를 겸하는 하급 장교였지만, 그는 전투 임무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무장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고려군의 북진 길목에 자리한 함흥 인근의 석성은 여진족이 점거한 핵심 방어 거점이자, 동북면으로 나아가려는 고려군에게는 반드시 넘어야 할 첫 관문이었다. 이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하면, 대규모 여진 정벌 계획 자체가 좌초될 수 있는 중대한 지점이었다.
그러나 석성을 지키는 여진족의 저항은 예상보다 훨씬 격렬했다. 그들은 견고한 성벽과 험준한 지형을 방패 삼아 필사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했고, 고려군의 공세를 집요하게 막아냈다. 선봉 부대는 빗발치는 화살과 돌 세례에 막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점차 전열이 흔들리며 군 전체에 패배의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위기의 순간, 모두가 망설이던 그때, 척준경이 홀로 나섰다. 그는 주저함 없이 칼과 방패를 움켜쥐고 쏟아지는 적의 공격을 뚫으며 단신으로 성벽을 기어올랐다. 마침내 성벽 위에 도달한 그는 눈앞의 적장들을 차례로 베어 넘기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무쌍의 용맹을 떨쳤다. 이 믿기 힘든 광경은 절망에 빠져 있던 고려군 진영에 순식간에 거대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용기에 감화된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다시 한번 총공격을 감행했고, 마침내 철옹성 같던 석성은 함락되었다. 척준경은 이 극적인 역전승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석성 함락은 단순히 하나의 성을 빼앗은 전투가 아니었다. 이는 북방을 향한 고려군의 진격로를 열어젖힌 상징적인 첫 승리였으며, 특히 척준경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등장과 그의 결정적 활약에 힘입어 거둔 성공이었다. 더 나아가, 국가적 역량을 쏟아부어 만든 '별무반'이라는 새롭게 편제된 군대의 실전 응용 능력을 증명했으며, 이후 전쟁 수행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분수령이기도 했다.
가한목 전투: 포위된 윤관을 구출하다
그러나 석성에서의 승리에 도취할 틈도 없이, 고려군은 곧바로 혹독한 시련에 직면했다. 지형이 좁고 험한 가한목으로 들어선 순간, 여진족이 미리 파놓은 교묘한 함정과 대규모 복병의 기습에 휘말린 것이다. 예기치 못한 공격에 고려군의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지휘 체계마저 마비될 위기에 처했다. 설상가상으로 부원수 오연총이 화살에 맞아 쓰러지고, 총사령관인 윤관마저 소수의 호위 병력과 함께 적진 깊숙이 고립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 벌어졌다. 고려군 전체가 붕괴될 수도 있는 이 위기의 순간, 자신을 중용해주었던 은인 윤관의 위급함을 외면할 수 없었던 척준경은 망설임 없이 나섰다.
그는 불과 10여 명의 결사대와 함께 윤관을 구출하겠다는, 누가 봐도 무모한 결단을 내렸다. 동생 척준신이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라며 눈물로 말렸지만, 척준경은 "나는 이미 이 한 몸을 나라에 바쳤다!"는 결연한 외침과 함께 적진의 심장부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겹겹이 에워싼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수십 명의 적병을 베어 넘기며 혈로를 열었다. 척준경이 이처럼 필사적으로 시간을 버는 동안, 다행히 최홍정, 이관진 등이 이끄는 후속 부대가 도착하여 협공하면서 윤관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윤관은 척준경의 손을 부여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이제부터 너는 나의 아들이니, 나를 아버지라 부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는 단순한 감정 표현을 넘어, 하급 장교였던 척준경이 총사령관의 확고한 비호 아래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부상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명실상부 윤관 휘하 '최고의 칼'이자 가장 신임 받는 오른팔로서 전장을 누비게 된다.
영주성 전투
가한목 전투에서의 예상치 못한 패배는 기세 좋게 진격하던 고려군에게 큰 충격과 타격을 안겼다.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채 전열을 정비하기도 전에 여진족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여진의 명장 알새가 이끄는 2만 대군이 고려군의 중요 거점인 영주성을 포위하면서 전세는 급격히 불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영주성 내부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성 안의 군량은 거의 바닥나 병사들은 굶주림에 지쳐갔고, 패배의 공포는 싸울 의지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총사령관 윤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외부의 구원군만을 기다리는 소극적인 농성만이 유일한 길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모두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기다림이기도 했다.
이 암울한 침묵 속에서, 오직 척준경만이 다른 목소리를 냈다. 그는 '적이 계속 늘어나고 성 안의 식량이 바닥나면 결국 모두 굶어 죽게 될 뿐인데, 어찌 싸우지 않고 버티기만 하겠습니까?'라며 소극적인 농성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오히려 성문을 열고 나가 역습을 감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지휘부의 회의적인 시선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연히 결사대를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척준경은 용맹하게 적진으로 돌격하여 포위하고 있던 여진군을 크게 뒤흔들었고, 적병 19명의 수급을 거두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이 대담하고 예상치 못한 역습은 알새가 이끄는 여진군의 포위 전열에 균열을 일으켰고, 마침내 그들을 물러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그의 용전은 단순히 적을 물리친 것을 넘어, 패배감에 젖어 있던 고려군 전체에 다시 싸울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를 지핀 전환점이었다.
척준경이 의기양양하게 개선하자, 성 안에서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귀환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절망을 뚫고 승리를 가져온 영웅의 행진이었다. 굶주림과 패배감에 짓눌려 있던 병사들은 그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용기를 얻고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성루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윤관과 여러 장수들 역시 그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직접 누각 아래로 내려와 척준경의 손을 잡고 경의를 표하며 그 용기와 공로를 높이 치하했다. 영주성 전투는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한 사람의 불굴의 의지와 용기가 전세를 뒤집고 희망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웅주성 전투
척준경의 영웅적인 활약으로 영주성의 포위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나, 여진족의 공세가 완전히 꺾인 것은 아니었다. 여진족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원수 윤관은 전열을 가다듬고 동북면의 주요 거점들에 대한 방어를 서둘러 강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척준경은 장수 최홍정이 수비하던 웅주성으로 이동하여 방어선에 합류했다. 그러나 고려군의 재정비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여진의 명장 알새는 주력을 이끌고 정면 승부가 어려워진 영주성 대신, 상대적으로 방비가 허술하다고 판단한 웅주성으로 주력 부대를 이동시켜 공격 목표를 변경하는 교활함을 보였다. 당시 웅주성은 알새가 이끄는 수만 대군의 집중 공격 앞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영주성과 마찬가지로 웅주성 역시 외부와의 연락이 끊긴 채 고립되었고, 격렬한 공격 속에 함락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성주 최홍정은 마지막 희망을 오직 한 사람,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었던 척준경에게 걸었다. 그는 척준경에게 직접 '만약 그대가 포위망을 뚫고 나가 구원군을 데려오지 못한다면, 성 안의 병사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며 눈물로 호소했다.
최홍정의 간곡한 청을 받은 척준경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또다시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중대한 임무를 받아들여, 한밤중 해진 옷으로 갈아입은 채 홀로 밧줄에 몸을 의지해 웅주성 성벽을 내려왔다. 적의 삼엄한 포위망을 기적적으로 돌파하는 데 성공한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 마침내 고려 국경인 정주에 도착했다. 정주에 도착한 척준경은 지체 없이 흩어져 있던 병력을 수습하고 지휘하여 구원군을 편성, 다시 웅주성을 향한 험난한 진격을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통태진, 야등포, 길주 등 여진군이 매복하거나 저항하는 곳곳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그들을 연파하며 피로 물든 길을 뚫고 나아갔다.
마침내 척준경이 이끄는 구원군이 웅주성 근처에 나타나자, 포위 속에서 절망적인 항전을 이어가던 성 안의 병사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성 안의 군사들과 척준경의 구원군이 안팎에서 협공하자 당황한 여진 대군은 여진 대군은 삽시간에 전열이 흐트러지며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결국, 거센 기세를 감당하지 못하고 버티지 못한 채 퇴각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웅주성은 기적적으로 포위에서 벗어나 구출되었다. 이는 또 한 번 척준경 개인의 초인적인 담력과 탁월한 지휘력, 그리고 불가능에 굴하지 않는 의지가 빚어낸 기적과 같은 승리였으며, 그의 명성을 고려 전역에 다시 한번 떨치게 만들었다.
동북 9성 축조와 변화하는 전쟁의 양상
웅주성의 극적인 구출 이후, 고려군은 여세를 몰아 함흥 평야 일대를 장악하고 여진족을 북쪽으로 밀어냈다. 이는 윤관이 이끈 대규모 원정의 주요 목표였던 동북 9성 축조로 이어졌다. 새로 확보한 영토 곳곳에 세워진 이 아홉 개의 성은 고려의 새로운 북방 경계선이자 여진족 견제를 위한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척준경의 공적은 마침내 조정의 인정을 받았으며, 특히 웅주성 구출의 결정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정6품 공부원외랑에 제수되었다. 공부는 국가의 토목, 건축, 공예 제작 등을 관장하던 중앙 부서였으며, 원외랑은 그 부서의 실무를 담당하는 비록 문관직이었으나 비교적 높은 품계(정6품)의 직책이었다. 이는 하급 장교에서 중앙 정부의 관료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승진이었으며, 총사령관 윤관의 절대적인 신임은 그의 입지를 더욱 굳건히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9성 축조라는 고려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삶의 터전을 잃고 북쪽으로 밀려난 여진 부족들은 곧 전열을 재정비하고, 정면 대결 대신 고려가 새로 구축한 성들과 보급로를 끊임없이 기습하고 교란하는 방식으로 저항의 수위를 높였다. 넓은 지역에 분산된 9성을 유지해야 하는 고려군에게 이는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끈질긴 형태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에 따라 전쟁의 양상은 대규모 회전 중심에서, 적의 유격 부대에 맞서 싸워야 하는 소모적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정치 앞에서 무력은 빛을 잃다
그러나 전장을 호령하던 그의 검도, 복잡한 정치판의 권력 다툼 속에서는 길을 잃고 말았다. 자신을 이끌어주던 윤관과 오연총 등이 세상을 떠나자, 든든한 후원자를 잃은 척준경은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외척 이자겸에게 의탁하게 된다. 정치적 식견이 부족했던 그는 이자겸의 야망에 이용당했고, 결국 1126년 고려 정치사의 큰 오점인 '이자겸의 난'에 핵심 인물로 가담하는 파국을 맞는다. 그는 반란군의 선봉에 서서 궁궐에 불을 지르고 왕의 침전까지 난입하는 등, 왕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다.
이후 이자겸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인종의 회유책이 성공하면서 뒤늦게 왕의 편으로 돌아섰고, 이자겸을 체포하여 난을 진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반란 가담이라는 주홍글씨는 지워지지 않았고, 결국 모든 권력을 잃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비록 말년에는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히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정치적 몰락은 명백했다.
척준경은 전장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용맹과 달리, 권력의 속성과 정치의 흐름을 읽는 데는 명백히 서툴렀다. 그 결과 천하무적과 같았던 그의 무력은, 윤관 아래에서는 나라를 구하는 검이 되었지만 이자겸 아래에서는 왕실을 위협하고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흉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구국의 영웅과 반역의 주모자. 이 극단적인 두 얼굴을 모두 가진 그는, 시대의 풍파 속에서 자신의 힘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비운의 무장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끝맺음: 검이 된 사람
“이 몸은 이미 나라에 바쳤다.”
가한목 전투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돌격하며 남긴 이 말은, 척준경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단순한 병사나 장수를 넘어, 때로는 전쟁의 향방 자체를 뒤바꾼 '하나의 군대'와 같은 존재였다. 한 개인의 무력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실전으로 증명해낸 것이다. 윤관의 손에서는 고려를 지키는 예리한 검이었으나, 이자겸의 손에서는 흉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의 삶은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시대를 이끈 자들의 손에 쥐어진 도구와 같았지만,그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역사의 물결은 거세게 요동쳤다. 비록 정치적 식견 부족으로 반역에 가담하고 끝내 몰락했지만, 그의 압도적인 전투 기록만큼은 시대를 초월하여 한국사 최강의 무인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가 휘두른, 하늘이 내린 듯한 무력은 단순한 기술을 넘어 고려의 전쟁사를 새로 쓴 힘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현대의 대중, 특히 젊은 세대는 그에게 ‘소드마스터 척준경’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는 판타지 장르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의 신기에 가까운 검술과 전장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개인 전투 능력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온라인상의 역사 토론 등에서는 한국사 인물들의 무력을 비교하며 그를 '1티어(Tier 1)' 즉, 최상위 등급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지휘관으로서의 능력보다는 순수한 개인의 무예만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일종의 현대적 '밈(meme)'이자 평가인 셈이다. 결국 척준경은, 좋든 나쁘든 한 인간이 지닌 무력의 극한이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준, 한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보적인 '검객'이자, 그의 이야기는 '전설'이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1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미야모토 무사시
(2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도널드 맥베인
(3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척준경
(4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슈발리에
(완)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줄리 도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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