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1월 22일 일어난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사건은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당시 46세이던 케네디 대통령은 아내 재클린 케네디여사와 함께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링컨 컨버터블 차량을 타고 시가행진 중이었다. 이 시가 행진은 케네디 대통령이 텍사스 주의 정치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고, 다가오는 재선을 위한 지지세를 확보하기 위한 중요한 방문의 일부였다. 그때 한 발의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의 등에 맞고 목을 관통했다. 이어 몇 초 후 발사된 두 번째 총알이 그의 두개골을 산산조각냈다. 재클린 여사가 충격 속에서 남편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치명상을 입은 대통령은 파크랜드 기념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도착 후 약 30분 만인 오후 1시경 사망 판정을 받았다.
전직 해병대원이자 자칭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리 하비 오스월드가 케네디 암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되었으나, 그는 재판을 받기도 전에 살해당했다. 워런 위원회는 오스월드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결론내렸으나, 그 과정은 석연치 않은 점들로 가득했다. (여기서 워런 위원회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후임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설치된 특별 조사 위원회이다.) 핵심 증거물의 유실과 일부 증언의 조작 의혹, 그리고 CIA와 FBI의 정보 은폐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정부가 사건의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은 더욱 증폭되었다. 단순한 개인의 범행이라는 결론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던 대중은 암살 배후에 더 거대한 음모가 있을 것이라 의심하기 시작했고, 이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속된 논쟁과 의혹의 불씨가 되었다.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은 그 이후 수십 년 동안 소문에 소문을 물고 수많은 의혹과 음모론을 불러일으켰다. 이 글에서는 1963년의 비극을 재조명하며, 그날 벌어진 일과 그 뒤로 이어진 의혹 속에 감춰진 진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케네디 대통령은 첫 암살 표적이 아니었다
1963년 4월 10일, 리 하비 오스월드는 몇 주간 뒤를 밟아온 표적을 향해 총을 발사했으나 빗나갔다. 그 표적은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진 보수 정치인, 전직 미국 육군 장군 에드윈 워커였다. 오스월드는 워커의 집 밖에서 그의 사생활을 감시하며 공격 기회를 노렸고, 마침내 밤늦게 창문을 통해 저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총알은 창틀을 스치고 지나가며 워커를 살해하는 데 실패했다. 당시 오스월드가 사용한 만리허-카르카노 소총은 불과 7개월 뒤, 케네디 대통령을 암살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오스월드의 아내 마리나는 나중에 수사관들에게 남편이 워커 저격을 시도했다고 증언했으며, 그가 찍은 워커 주택의 정찰 사진도 발견되었다. 두 사건 모두에서 동일한 무기가 사용되었다는 점은 이후 수사 과정에서도 중요한 단서가 되었지만, 워커 암살 미수 사건과 케네디 암살 사건 사이의 연관성은 FBI에 의해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 일부 연구자들은 오스월드의 워커 저격 시도가 "연습"이었으며, 케네디 암살을 위한 사전 단계였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2. 그날 총에 맞은 사람이 케네디 대통령만은 아니었다
1963년 11월 22일,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그날, 총격의 희생자는 대통령뿐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차량의 앞좌석에는 텍사스 주지사 존 코널리가 앉아 있었다. 첫 번째 총탄이 케네디 대통령의 등을 맞고 목을 관통한 직후, 두 번째 총탄이 코널리의 몸을 잇달아 뚫고 지나갔다. 그는 가슴, 폐, 등, 손목, 허벅지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지만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그러나 그의 부상은 단순한 생존담을 넘어, 케네디 암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가장 논란이 된 ‘단일 총알 이론(Single Bullet Theory)’의 핵심이 되었다.
워런 위원회는 하나의 총알이 케네디의 등을 맞고 목을 관통한 뒤, 코널리 주지사의 몸을 연속적으로 뚫고 나갔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총알이 두 사람을 연속적으로 관통하며 여러 곳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도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은 많은 의구심을 남겼다. 만약 단일 총알 이론이 사실이 아니라면, 암살 현장에는 또 다른 저격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는 이후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둘러싼 음모론의 주요 쟁점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총탄은 군중에게도 피해를 입혔다. 케네디 대통령의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제임스 태그는 예상치 못한 총격의 희생자가 되었다. 대통령을 향해 발사된 총탄 중 하나가 도로의 가장자리에 설치된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경계석에 부딪혀 튀었고, 그 파편이 태그의 뺨을 스쳤다. 태그의 부상은 사소한 듯 보였지만, 총탄의 궤적과 실제 발사된 총알의 수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추가 저격수 가능성을 더욱 증폭시켰다.
케네디 암살 45분 후, 댈러스 경찰관 J. D. 티핏은 오스월드를 검거하려다 목숨을 잃었다. 암살 용의자가 된 오스월드는 도주 중이었고, 길에서 그를 마주친 티핏 경찰관은 그의 신원 확인을 시도했다. 그러나 오스월드는 망설임 없이 리볼버를 꺼내 네 발의 총탄을 발사했고, 티핏은 현장에서 즉사했다. 티핏의 죽음은 오스월드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3. 린든 B. 존슨 부통령, 케네디 사망 1시간 39분 만에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순간, 부통령 린든 B. 존슨과 그의 아내 클라우디아 존슨은 대통령 차량을 두 대 뒤따르는 차에 타고 있었다. 총격이 가해진 직후, 그들은 급히 파크랜드 기념병원으로 향했고, 오후 1시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 판정을 받았다.
이 비극적인 순간이 국가적 충격으로 퍼져나가는 가운데, 존슨 부부는 재클린 케네디 여사, 경호원들, 그리고 대통령의 시신과 함께 에어포스 원에 올랐다. 그리고 그곳에서, 텍사스 출신 연방 판사 사라 T. 휴즈의 입회 아래 미국의 36대 대통령으로서 취임 선서를 했다. 취임 선서 당시, 재클린 케네디는 여전히 피로 얼룩진 핑크색 샤넬 정장을 입은 채 남편의 시신 옆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은 세실 스튜튼(Cecil Stoughton)이 촬영한 사진으로 기록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렬한 장면 중 하나로 남게 되었다. 사진 속 존슨의 얼굴은 결연했지만, 그 옆에 선 재클린 케네디의 망연자실한 표정과 피 묻은 옷은 국가가 겪고 있는 충격과 슬픔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존슨의 즉각적인 취임은 국가의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한 절박한 조치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시신이 안치된 기내에서, 그것도 국가적 비극이 발생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루어진 취임식은 일부에게는 경솔하고 무례한 행동처럼 보였다. 애도와 충격 속에서 이루어진 이 권력 이양은 필요한 조치였을까, 아니면 지나치게 서둘러 이루어진 정치적 계산이었을까?
케네디 암살을 둘러싼 다양한 음모론은 이러한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일부 극단적인 음모론자들은 존슨이 케네디 암살의 배후에 있었다고까지 주장했다. 여기에 존슨과 케네디 사이의 알려진 정치적 긴장, 그리고 텍사스 석유 산업계와 존슨의 유착 의혹이 더해지면서, 그의 취임을 둘러싼 논란은 더욱 커졌다. 존슨이 텍사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치적 인물이라는 점, 그리고 케네디 암살이 텍사스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가 배후에 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들에게 강한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비록 워런 위원회는 존슨이 암살과 무관하다고 결론지었지만, 그의 신속한 취임이 단순한 국가적 필요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정치적 야망과 연결된 것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애국적 결단과 권력욕이라는 상반된 해석이 교차하는 가운데, 존슨의 에어포스 원 취임식은 역사적 필요성과 논란이 공존하는 순간으로 남게 되었다.
4. 오스월드는 재판을 받기 전에 살해당했다
케네디 암살 사건 이틀 후, 댈러스 경찰서 지하 주차장은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의 현장이 되었다. 나이트클럽 업주 잭 루비는 생중계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댈러스 경찰서 유치장에서 댈러스 카운티 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리 하비 오스월드를 권총으로 사살했다. 당시 루비는 인파와 취재진에 섞여 있었고, 그 누구도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오스월드가 댈러스 경찰서 유치장을 나오는 순간, 루비는 숨겨둔 권총을 꺼내 오스월드에게 치명적인 총상을 입혔다. 이 충격적인 장면은 전국에 생중계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오스월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의혹을 남겼다. 사람들은 그가 재판에서 배후 세력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공개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누군가가 그를 입막음하려 했다고 의심했다. 특히 오스월드가 진짜 암살범이 아니었거나, 더 큰 음모의 일환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의 죽음이 단순한 우발적 범행이 아니라 계획된 살해였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나 루비는 자신의 행동이 순전히 감정적인 충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법정에서 "재클린 케네디 여사가 재판을 위해 다시 댈러스로 돌아오는 고통을 겪지 않도록 오스월드를 죽였다"고 말했다. 루비의 이 주장은 일부에게는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의 진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루비는 살인죄로 기소되었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그의 정신 상태와 실제 동기에 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과연 순수한 애국심과 감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인지, 혹은 더 큰 세력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또한 루비가 마피아, FBI, 혹은 CIA와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실제로 루비는 조직범죄와 연관된 인물들과 친분이 있었으며, 그의 나이트클럽은 마피아와의 연루설이 끊이지 않았다. 그의 유죄 판결은 한 차례 번복되었지만, 루비는 두 번째 재판을 앞두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으로 감옥에서 사망했다. 이는 그의 죽음마저도 단순한 자연사인지, 혹은 또 다른 ‘입막음’이었는지에 대한 의혹을 남겼다. 오스월드가 진범이었는지, 루비의 암살이 자발적 행동이었는지, 혹은 배후 세력이 있었는지—이 모든 의문은 케네디 암살 사건의 미스터리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의 죽음과 함께, 많은 진실이 묻혀버렸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의혹과 논쟁의 중심에 남아 있다.
5. 케네디 암살 사건은 여러 정부기관과 위원회에서 조사됐지만 결론은 엇갈렸다
케네디 암살 사건이 발생한 지 일주일 후,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얼 워런 대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워런 위원회를 구성했다. 10개월에 걸친 방대한 조사 끝에 위원회는 "리 하비 오스월드는 단독 범인이며, 어떤 국내외 음모에도 연루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이 발표는 곧바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이들은 오스월드가 혼자서 미국 대통령을 암살했다는 결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필립 쉐논은 그의 저서 《A Cruel and Shocking Act: The Secret History of the Kennedy Assassination》에서,
"고작 21달러짜리 우편으로 주문한 소총을 든 이 작은 남자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공포스러웠다"
고 지적하며 대중이 가졌던 불신을 대변했다. 워런 위원회의 발표가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남겼고, 정부의 발표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 사회는 정부 기관, 특히 CIA와 FBI의 활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1971년에는 펜타곤 페이퍼(Pentagon Papers)가 공개되며 미국 정부가 국민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하며 전쟁을 확대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면서 닉슨 행정부가 정적을 불법적으로 감시하고, 이를 은폐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개입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정부와 정보기관의 신뢰는 바닥을 쳤다. FBI와 CIA가 국내에서 불법 감청과 정치적 사찰을 벌였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정부의 발표는 더 이상 절대적인 권위를 갖지 못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부가 케네디 암살 사건을 조작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다시 불거졌다.
1975년, 프랭크 처치 상원의원이 주도한 ‘처치 위원회’는 CIA와 FBI의 불법 활동을 조사하며, 이 기관들이 해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정치적 암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더 나아가, 1976년 미 하원 암살 사건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며 케네디 암살 사건의 새로운 조사가 시작되었다. 위원회는 1978년, 케네디 대통령이 "아마도 음모의 결과로 암살되었다"고 발표하며 워런 위원회의 결론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러나 이 위원회 역시 암살의 배후를 특정하지 못했고, 조사 결과의 신빙성도 논란이 되었다.여러 정부 기관과 위원회가 내놓은 불투명하고 상반된 결론은, 오히려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둘러싼 의구심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정부 발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신뢰를 잃었고, 대통령 암살이라는 국가적 비극이 단순한 개인의 범행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음모와 연결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대중의 인식이 확산되었다.
6. CIA는 케네디 암살 몇 달 전부터 오스월드를 감시하고 있었다
리 하비 오스월드는 1959년 소련으로 망명했다가, 1962년 소련 출신 아내 마리나와 함께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이력은 이미 미국 정보기관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CIA와 FBI는 그를 감시하는 데 있어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1963년 9월, 케네디 암살 한 달 전, 오스월드는 멕시코시티를 방문해 소련 대사관과 쿠바 대사관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쿠바 공산당 관계자 및 소련 정보요원들과 접촉하며, 케네디를 암살할 계획을 논의했다는 정황이 포착되었다. 그러나 CIA는 이와 관련된 정보를 워런 위원회에 축소 보고했다.
이 사실을 연구한 저널리스트 필립 쉐논은 "CIA는 워런 위원회에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암살 직후 CIA와 FBI는 오스월드를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고독한 늑대(lone wolf)'로 묘사하며, 사전에 그의 위험성을 파악할 수 없었다는 허울뿐인 이야기를 꾸며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CIA와 FBI가 이미 몇 주 전부터 오스월드를 면밀히 감시하고 있었으며, 그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드러났다.
정보기관이 오스월드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음에도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은 이후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단순한 감시 대상이었을 뿐인지, 혹은 더 큰 정치적 게임 속에서 이용당한 존재였는지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었다. 더구나 CIA와 FBI는 자신들의 정보 실패가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했고, 이로 인해 케네디 암살을 막을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CIA와 FBI는 암살 이전 오스월드를 감시하고 있었으면서도, 암살 이후에는 오스월드의 배후를 숨기려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이러한 모순된 대응은 정부가 암살의 전모를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묵인했을 가능성까지 제기하게 만들었다. 오늘날까지도 "케네디 암살은 단순한 범행이 아니라, 정보기관이 방관했거나 개입했을 수도 있다"는 의혹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7. FBI는 케네디 피격 이틀 전 오스월드가 FBI를 방문한 증거를 없앴다
케네디 암살을 불과 이틀 앞둔 시점, 리 하비 오스월드는 댈러스의 FBI 사무실을 직접 방문했다. 그는 자신을 감시하던 FBI 요원 제임스 P. 호스티에게 협박성 쪽지를 남겼다. 그러나 이 중요한 단서는 FBI 내부에서 처리되지 않고 상부의 지시에 따라 즉시 폐기되었다. 이 사건을 연구한 저널리스트 필립 쉐논은 FBI가 이 증거를 없앤 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은폐 행위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FBI가 오스월드의 협박을 사전에 인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면, 기관은 케네디 대통령이 댈러스에 도착하기 전 오스월드를 체포할 수 있었음에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은 FBI가 케네디 암살을 사전에 막을 기회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동시에 기관의 명성과 신뢰를 손상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였다.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이틀 후인 1963년 11월 24일, 당시 FBI 국장 제이 에드거 후버는 내부 메모를 남겼다. 그 메모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반드시 오스월드가 진짜 암살범임을 대중에게 각인시켜야한다 ."
이 문장은 FBI의 방향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FBI는 케네디 암살 사건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오스월드를 단독 범인으로 확정하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라고 판단했다. 기관의 감시 실패가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추가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해 오스월드가 단독으로 행동한 범인이라는 이미지를 신속하게 굳히려 했던 것이다.
필립 쉐논은 이와 관련해 "제이 에드거 후버와 FBI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FBI가 케네디 암살 전에 오스월드를 감시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면, FBI의 신뢰뿐만 아니라 후버 자신의 명성까지도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FBI는 단순히 조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큰 국제적 위기를 방지하기 위한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냉전이 극도로 긴장된 시기, 미국 정부는 암살 사건이 소련이나 쿠바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암살 직후 몇 시간 동안, 만약 이 사건이 소련이나 쿠바의 개입으로 발생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면, 미국은 곧 전쟁으로 치닫게 될 수도 있다는 현실적인 우려가 있었다. 결국, FBI는 자신들의 감시 실패를 은폐하는 동시에, 국제적 충돌을 방지하고, 오스월드를 ‘단독 범인’으로 확정짓는 전략을 선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핵심 증거를 폐기하고, 의도적으로 정보를 조작했다는 점은 여전히 강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이 단순한 개인의 범행이었는지, 혹은 FBI를 비롯한 정보기관들이 더 큰 그림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8. 워런 위원회의 한 변호사가 피델 카스트로를 비밀리에 인터뷰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을 조사하던 워런 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오스월드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그 과정에서 알려지지 않은 비밀스러운 접촉도 있었다. 위원회 소속 변호사 윌리엄 콜먼은 쿠바의 독재자 피델 카스트로와 극비리에 접촉해 암살 사건과 관련된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쿠바 연안 바다 위에서 낚싯배를 타고 이루어졌으며, 인터뷰는 약 세 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카스트로는 자신이 케네디 암살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하게 부인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인터뷰 사실을 위원장 얼 워런과 또 다른 한 명의 조사관만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워런 위원회의 공식 조사와는 별개로, 이 사건이 쿠바와 연관되었을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비공식적 접근이 있었던 셈이다.
한편, CIA는 워런 위원회에 쿠바와 관련된 CIA의 자체적인 비밀 작전을 보고하지 않았다. CIA는 수년에 걸쳐 피델 카스트로를 암살하려는 여러 차례의 시도를 했으며, 그중 일부 작전에는 마피아와의 협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CIA와 조직범죄 집단이 손을 잡고 외국 국가원수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이는 기관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치욕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필립 쉐논은 이에 대해 "CIA가 이러한 작전을 감추려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분석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죽음은 이후로도 끊임없는 논쟁과 음모론을 낳았다.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미국 의회는 1993년 ‘존 F. 케네디 암살 기록 수집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모든 정부 기관이 암살 관련 기록을 확인·검토하고, 이를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이관할 것을 의무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많은 기록이 기밀로 유지되거나 완전히 공개되지 않았으며, CIA와 FBI의 역할을 둘러싼 의혹은 여전히 남아 있다. 워런 위원회의 공식 조사 뒤에 감춰진 비밀들, CIA의 음모, 그리고 정보기관이 은폐한 사실들이 케네디 암살 사건을 현대사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사건 중 하나로 남게 만든 이유다.
끝맺음: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남아 있다
케네디 암살 사건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이 아니다. 이 사건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지금도 대중 사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묻는다. 그날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오스월드는 혼자였을까, 아니면 더 큰 그림 속의 한 조각이었을까? FBI와 CIA는 무엇을 알고 있었고, 무엇을 숨겼을까? 혹은, 그들은 진실을 알고도 은폐해야 하는 말못하는 속사정이 있었는가?
최근 재선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 공약 중 하나로 케네디 암살 관련 문건을 모두 기밀 해제(Declassify)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전에도 여러 차례 공개가 약속되었음에도 여전히 일부 문서는 미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과연 이번에는, 60년 넘게 봉인된 진실이 세상에 밝혀질 것인가?
미국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사건 중 하나로 남은 케네디 암살. 진실은 여전히 어둠 속에 묻혀 있고, 그날의 총성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 메아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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