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슬링

지옥의 비행: WWE를 뒤흔든 최악의 기내 난동 사건

OUTNUMBERED 2025. 2. 23. 10:36

2002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인서렉션" PPV를 마친 WWE 선수단은 미국행 전세기에 올랐다.
2002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인서렉션" PPV를 마친 WWE 선수단은 미국행 전세기에 올랐다.

 

2002년 5월 5일, 영국 런던에서 '인서렉션(Insurrection)' PPV를 마친 WWE 선수단과 스태프는 긴 유럽 투어의 피로를 안고 미국행 전세기에 올랐다. 축적된 피로와 투어 종료의 해방감이 뒤섞인 기내 분위기는 곧 광란으로 변질되었다. 빈스 맥마흔 WWE 회장이 선수단을 위해 준비한 전세기 안에는, 마음껏 술을 마실 수 있는 '오픈 바'가 마련되어 있었다. 여기에 일부 선수들의 불법 약물 남용까지 더해지며, 기내는 통제 불능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른바 “지옥의 비행” 사건은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 중 하나로 기록되며,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이 글에서는 '지옥의 비행' 사건의 배경, 기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들, 그리고 그 후폭풍과 업계에 미친 영향을 심층 분석하려고 한다.


광란의 전주곡: 피로와 해방감,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위기

WWE의 회장 빈스 맥마흔은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편의, 복지 차원에서 특별히 전세기를 준비했다.
WWE의 회장 빈스 맥마흔은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편의, 복지 차원에서 특별히 전세기를 준비했다.

 

장기간의 전유럽 투어를 영국 런던에서 마무리한 WWE 선수단과 스태프는 녹초가 된 상태였다. 빡빡한 경기 일정은 물론, 유럽과 미국을 오가는 시차 적응의 어려움까지 겹쳐 피로가 극심했다. 하지만 빈스 맥마흔 WWE 회장이 선수와 스태프들의 편의, 그리고 대규모 인원의 효율적인 이동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런던발 코네티컷주 스탬퍼드행 보잉 747 전세기에 오르는 순간,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그들을 덮쳤다. 마치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의 심정이랄까. 대규모 인원이 탑승한 전세기 안은, 흡사 '떠들썩한 뒤풀이' 현장을 방불케 했다. 억눌렸던 긴장이 풀리면서, 선수와 스태프 할 것 없이 모두 들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앞으로 벌어질 대형 사고의 불씨가 되었다.

오픈 바와 약물의 문제

당시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사기 진작과 복지 차원에서 전세기 내에 "오픈 바"가 제공되었다.
당시 선수들과 스태프들의 사기 진작과 복지 차원에서 전세기 내에 "오픈 바"가 제공되었다.

 

WWE 투어 막바지에는 으레 회식 분위기가 조성되곤 했다. 빈스 맥마흔은 선수들의 사기 진작과 복지 차원에서 전세기 내에 '오픈 바'를 마련했다. 하지만 이는 선수들의 피로를 달래주기는커녕, 통제 불능의 상황을 야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문제는 술뿐만이 아니었다. 일부 선수들은 GHB(Gamma-Hydroxybutyrate) 같은 불법 약물을 소지하고 있었다. GHB는 중추신경 억제제의 일종으로, 소량 복용 시 행복감과 도취감을 유발하지만, 과다 복용할 경우 의식 불명, 호흡 곤란, 심지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물질이다. 특히 한국에서는 '물뽕'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데이트 강간 범죄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아 각별한 주의가 필요한 약물이다. 더욱이 당시 미국에서는 GHB가 위험성에 비해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들은 기내에서 공공연하게 GHB를 복용했다는 충격적인 증언들이 잇따랐다. 게다가, 당시 WWE에는 스테로이드와 진통제 등 각종 약물 남용 문제가 만연해 있었기에, 기내에서 다른 불법 약물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수십 명의 건장한 프로레슬러들이, 좁고 밀폐된 비행기 안에서, 무제한 제공되는 술과 약물에 취해 흥분한 상태. 이는 마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대형 사고는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옥행 비행기에서 벌어진 일들:

커트 헤닝과 브록 레스너의 기내 레슬링

 

당시 WWE를 이끌 차기 스타로 기대를 받았던 "브록 레스너"
당시 WWE를 이끌 차기 스타로 기대를 받았던 "브록 레스너"

 

미스터 퍼펙트로 잘 알려진 베테랑 커트 헤닝과 당시 신예였던 브록 레스너는 둘 다 미네소타 출신으로, 아마추어 레슬링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술기운이 오른 상태에서,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된 둘의 신경전은 순식간에 '장난'을 빙자한 격렬한 몸싸움으로 번졌다. 문제는 그들이 몸싸움을 벌인 장소였다. 그들은 비행기 비상구 문 바로 옆에서 뒤엉켜 격투를 벌였다. 결국 데이브 핀리, 트리플 H, 폴 헤이먼 등 동료들이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했다. 레슬러들의 엄청난 힘과 체중을 고려할 때, 자칫 비상문이 열릴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다행히 문은 열리지 않았지만, 이 아찔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얼어붙고 말았다. 단순한 객기가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던 순간이었다.

 

릭 플레어의 ‘바바리맨’ 성추행 논란

"네이처 보이" 릭 플레어.
"네이처 보이" 릭 플레어.

 

 

'네이처 보이'라는 링네임으로 유명한 프로레슬링계의 전설 릭 플레어. 그는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추태로 자신의 커리어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술에 만취한 플레어는 기내에서 망토만 걸친 알몸 상태로 복도를 활보하며, 항공사 소속 승무원 두 명에게 접근했다. 그는 자신의 성기를 노출하며 강제로 추행을 시도했고, 이에 극심한 수치심과 모욕감을 느낀 승무원들은 이후 WWE를 상대로 법적 대응에 나섰다.

 

골더스트의 사랑 노래와 섹드립

기괴하고 선정적인 기믹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골더스트"
기괴하고 선정적인 기믹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골더스트"

 

 

기괴하고 선정적인 기믹으로 한때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골더스트(더스틴 로즈). 하지만 '지옥의 비행'은 그의 커리어에 큰 타격을 입혔다. 만취한 골더스트는 기내 방송 시스템을 무단으로 점거하더니, 이혼한 전 부인 테리 러널스를 향해 세레나데, 아니 차라리 '소음 테러'에 가까운 행위를 시작했다. 음정, 박자는 물론이고 가사 내용마저도 귀를 의심케 하는 수준이었다. 그의 노래는 사랑 표현이 아닌, 술에 취해 내뱉는 음담패설과 저질스러운 욕설에 불과했다. 단순히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었다. 릭 플레어가 승무원들에게 성추행을 저지르는 동안, 골더스트는 옆에서 추임새를 넣듯 저속한 농담을 던지며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의 행동은 만취한 상태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평소 그의 비뚤어진 성 의식과 여성관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불법 약물을 남용한 스캇 홀의 난동

"베드보이" 기믹으로 악역 프로 레슬러의 한 획을 그었던 "스캇 홀"
"베드보이" 기믹으로 악역 프로 레슬러의 한 획을 그었던 "스캇 홀"

 

 

'지옥의 비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Razor Ramon'이라는 기믹으로 악역 프로 레슬러의 한 획을 그었던 스캇 홀이다. 그는 비행 내내, 마치 억눌렸던 광기를 분출하듯 기행을 일삼았다. 탑승 초반부터 다른 선수들에게 면도 크림을 뿌려대는 장난을 시작으로, 급기야 다른 선수들과 승무원에게 폭언과 욕설을 퍼붓는 등 도를 넘는 행동을 이어갔다. 문제는 그가 단순히 술에 취한 정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스캇 홀은 만취 상태에서, 평소 복용하던 진통제와 근육이완제, 그리고 GHB까지 섞어 복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그는 비행 중 완전히 의식을 잃고 실신하기에 이르렀다. 착륙 후, 휠체어에 실려 나오는 스캇 홀의 초췌한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이는 그동안 WWE 내부에서 공공연하게 제기되어 왔던 그의 알코올 및 약물 의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마이클 헤이즈의 폭주

당시 WWE 임원이었던 "마이클 헤이즈"
당시 WWE 임원이었던 "마이클 헤이즈"

 

'프리버즈(Fabulous Freebirds)'의 멤버로 명성을 떨쳤던 선수 출신이자, 당시 WWE 임원이었던 마이클 헤이즈. 그 역시 '지옥의 비행'에서 추악한 만행을 저질렀다. 술과 약물에 만취한 헤이즈는 빈스 맥마흔의 아내인 린다 맥마흔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노상방뇨를 하려다 제지당하는 추태를 부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헤이즈는 과거 경기 중 머리 부상을 당하고, 최근 수술을 마친 후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든 JBL(존 브래드쇼 레이필드)에게 다가가 상처 부위를 고의적으로 가격했다. 봉합 부위가 터져 다시 출혈이 시작되었고, 고통 속에 깨어난 JBL은 분노하여 헤이즈를 주먹으로 가격해 쓰러뜨렸다. 이 사건은 프로레슬링 업계에 한동안 회자된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만신창이가 된 헤이즈는 결국 잠들었고, 션 월트먼(엑스팍)은 몰래 그의 긴 머리카락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다음 날, 자신의 엉망이 된 머리를 발견한 헤이즈는 격분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옥의 비행'은 마이클 헤이즈에게 잊을 수 없는 굴욕과 상처만을 남겼다.


결과와 후폭풍

'지옥의 비행'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었다. WWE와 소속 선수들에게 깊은 상처와 엇갈린 운명을 안겨준, 프로레슬링 역사상 최악의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WWE는 즉각적인 조치에 나섰다. 기내 난동의 주범이었던 커트 헤닝과 스캇 홀은 즉시 방출되었고, 골더스트 역시 이후 WWE에서 제대로 된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졌다. '네이처 보이' 릭 플레어는 전설적인 위상 덕분에 징계를 피했지만, 성추행 소송에 휘말리며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반면, 당시 WWE가 차세대 슈퍼스타로 점찍었던 브록 레스너는 아무런 징계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회사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승승장구하며 WWE 간판스타로 성장했다. 이러한 WWE의 상반된 대처는 형평성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힘 있는 자에게만 관대한 처사'라는 비판을 받았다.


WWE의 뼈아픈 자성과 변화

'지옥의 비행'은 WWE에게 막대한 금전적, 이미지적 손실을 안겨주었다. 성추행 피해를 입은 승무원들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해야 했고, 추락한 회사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엇보다 "프로레슬러들이 링 밖에서는 얼마나 무책임하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라는 대중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결국 WWE는 뼈를 깎는 자성과 변화를 선택했다. 선수들의 알코올 및 약물 사용에 대한 규정을 대폭 강화하고, 기내 난동을 방지하기 위한 엄격한 내부 지침을 마련했다. 또한, 선수들의 정신 건강 관리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프로그램도 도입하는 등 재발 방지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수많은 팬들이 사랑하는 프로레슬링의 화려한 쇼맨십 뒤에는 언제나 혹독한 투어 일정과 심리적 압박이 함께한다. 그러나 그것이 집단 난동이나 범죄적인 일탈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지옥행 비행기’는 “무대 뒤편에서 일어나는 방종과 무책임이 결국 얼마나 큰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남았다. 앞으로 WWE와 프로레슬링계가 이 사건을 타산지석 삼아, 더 성숙하고 건강한 문화를 자리 잡게 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