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학

(2부) 사라진 비행기들: 끝내 돌아오지 못한 6편의 항공기 실종 기록

OUTNUMBERED 2025. 4. 5. 11:06

태평양 한복판, 조난 신호도 없이 사라진 하늘 위 호텔: 팬암 7편

하늘의 로맨스라는 별칭을 가진 호화 여객기 팬암 7편
하늘의 로맨스라는 별칭을 가진 호화 여객기 팬암 7편

 

1957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한 팬암 7편 여객기는 호놀룰루를 향해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중 갑작스럽게 통신이 끊겼다. '하늘의 로맨스(Clipper Romance of the Skies)'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비행기는 당대 최첨단 기종인 보잉 377 스트라토크루저였다. 편안한 침대칸과 칵테일 라운지는 물론, 캐비어와 샴페인이 포함된 7코스 기내식까지 제공하며 ‘하늘 위 호텔’이라 불릴 정도로 호화스러웠다. 하지만 이 화려한 비행은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비행 경로의 절반 지점을 지날 무렵 교신이 끊긴 뒤, 항공기는 실종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 교신 내용은 특별한 이상 징후가 없는 정기 보고였으며, 조난 신호(SOS)나 비상 호출은 발신되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팬암과 미 당국은 즉시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시작했다. 실종 닷새 후, 미 해군 항공모함이 호놀룰루 동쪽 약 900마일 해상에서 기체 잔해를 발견했다. 발견된 시신 19구 중 다수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어, 추락 직전 해상 불시착을 시도했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항공기 동체의 주요 부분과 나머지 25명의 탑승자는 끝내 찾지 못했다.

 

사고 원인을 조사하던 미 민간항공위원회는 인양된 시신 일부에서 높은 수치의 일산화탄소가 검출된 사실에 주목했다. 기내에서 화재가 발생했거나 엔진 배기가스가 객실로 유입됐을 가능성이 거론됐다. 보잉 377이 과거 엔진 과속이나 기계 결함으로 사건·사고가 잦았던 점도 의혹을 키웠다. 테러나 사보타주 같은 범죄 가능성 역시 검토됐지만, 이를 뒷받침할 만한 명확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팬암 7편의 비극적인 실종은 당시 항공 업계에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고를 계기로 항공 안전 기준이 전반적으로 재검토되었으며, 특히 엔진 및 프로펠러 점검 절차, 조난 신호 장비 규정, 비상착륙 절차 등이 크게 강화되었다. 승무원 비상 대응 훈련의 중요성 또한 강조되어, 이는 현대 항공 안전 시스템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한국전쟁 지원 작전 중, 돌아오지 못한 수송기 

한국전쟁 중 UN 수송작전 일환으로 투입된 캐나다 퍼시픽 항공 3505편 DC-4
한국전쟁 중 UN 수송작전 일환으로 투입된 캐나다 퍼시픽 항공 3505편 DC-4

 

한국전쟁의 포화가 한반도를 뒤덮던 1951년 7월 21일. 캐나다 퍼시픽 항공 소속 3505편 DC-4 여객기가 밴쿠버를 이륙해 도쿄로 향했다. 이 비행기의 임무는 특별했다. UN의 한국 에어리프트(Airlift) 작전의 일환으로, 전쟁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승객 31명과 승무원 6명, 총 37명을 태운 항공기는 중간 기착지인 알래스카 앵커리지에서 급유 후 최종 목적지로 날아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여객기는 끝내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

 

알래스카 해안 접근 중, 날씨는 급격히 나빠졌다. 세찬 비와 짙은 안개로 시야 확보가 어려웠고, 기온 급강하로 기체 결빙(icing) 현상까지 우려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마지막 무선 교신은 앵커리지까지 대략 90분 남았을 때였다. 이후 3505편은 아무런 조난 신호도 없이 통신이 끊겼고, 광활한 하늘 속으로 그야말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마지막 보고 내용은 일상적인 위치 확인일 뿐, 어떤 비상 상황도 감지되지 않았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과 캐나다는 즉시 대규모 수색을 벌였다. 알래스카의 험준한 산악 지대와 광활한 해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잔해는커녕 작은 파편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몇 주간 계속된 수색은 악천후와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결국 중단됐다. 37명에 달하는 탑승객과 승무원 전원의 생사는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사고 원인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설이 제기됐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은 급격한 기온 하강으로 인한 착빙 현상으로, 얼음이 날개나 엔진에 달라붙으면서 조종이 어려워졌다는 주장이다. 기상 악화 속에서 조종사가 방향 감각을 잃었을 가능성도 언급된다. 그러나 이를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단서가 없어, 어디까지나 추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잔해조차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 의문을 더욱 키운다. 혹독한 알래스카의 자연에 완전히 묻혀버린 것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운명을 맞았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캐나다 퍼시픽 항공 3505편의 실종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민간 항공기가 떠안아야 했던 위험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단순한 항공 사고가 아니라, 한국전쟁이 드리운 하늘길 위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기록됐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3505편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잔해 한 조각 없이 사라진 비행기는 여전히 알래스카 어딘가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거대한 섬광과 함께 사라진 노스웨스트 2501편: 미시간 호수는 침묵했다

미시간 호수 상공을 비행하던 노스웨스트 항공 2501편은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미시간 호수 상공을 비행하던 노스웨스트 항공 2501편은 섬광과 함께 사라졌다.

 

1950년 6월 23일 밤,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 2501편(DC-4 기종)이 뉴욕 라과디아 공항을 출발해 시애틀로 향했다. 미니애폴리스와 스포케인을 경유하는 이 야간 비행에는 승객 55명과 승무원 3명, 총 58명이 타고 있었다. 순항하던 비행은 자정 무렵 미시간 호수 상공에서 돌변했다. 거센 돌풍과 번개를 동반한 강력한 폭풍우 전선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미 같은 항로의 다른 항공기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우회한 뒤였다. 기장 로버트 린드는 미시간주 벤턴 하버 인근, 고도 3,500피트 상공에서 폭풍을 피하고자 2,500피트로 하강을 요청했다. 하지만 관제탑은 인근 항공기와의 충돌 위험을 들어 이를 불허했다. 이것이 2501편과의 마지막 교신이었다. 지상 목격자들은 폭발음과 함께 불꽃이 튀는 듯한 소음과 동시다발적으로 “거대한 섬광”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기체가 공중에서 폭발했거나 구조적 붕괴를 일으켰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증거였다.

 

미 해안경비대는 밀워키 근처의 기름 유출을 단서로 수색에 나섰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었다. 이틀 뒤 정반대편인 사우스 헤이븐 연안에서 약 16km(10마일) 떨어진 지점에서 항공사 로고가 찍힌 담요, 좌석 쿠션 등 기체 일부와 희생자들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다. 수색 방향은 급히 수정됐지만, 소나(음파탐지기)와 저인망 어선까지 동원해 호수 바닥을 샅샅이 훑었음에도 동체는 끝내 찾지 못했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미시간 호수의 흙탕물(시계 약 20cm 미만)은 잠수부들의 수색마저 좌절 시켰다.

 

미 민간항공위원회(CAB)의 최종 조사 결과는 '원인 불명'. 당시 미국 상업 항공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58명 사망)를 낸 사고였지만, 결정적 증거인 동체를 찾지 못해 원인 규명은 불가능했다. 폭풍 속에서의 기체 결함이나 조종 능력 상실 등이 원인으로 추정될 뿐이었다.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이라, 마지막 순간 기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길은 더욱 막막했다. 사고 해역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탐사의 대상이 됐다. 미시간 난파선 연구 협회(MSRA)는 지난 수십 년간 소나를 이용해 추정 지점 주변 약 777 제곱킬로미터(300평방마일)를 탐색, 14척의 다른 난파선을 발견했지만 2501편의 잔해는 아니었다. 유명 해저 탐험가 클라이브 커슬러 역시 2004년부터 10년간 수색에 힘을 보탰지만 성과는 없었다.

 

이 사고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피해자들의 가족에게 많은 아픔을 남겼다. 연구가 발레리 반 히스트는 2006년부터 7년간 희생자 58명 중 52명의 유족을 찾아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겼다. 2015년 사고 65주기에는 사우스 헤이븐 레이크뷰 공동묘지에 수습된 유해를 안치한 집단 묘역과 추모비가 세워졌다. 미시간 해양 박물관에서는 매년 "치명적 비행(Fatal Crossing)"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를 통해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다.

 

2501편의 비극은 1950년대 항공 기술의 명백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이는 이후 기상 예보 시스템 개선, 항공 교통 관제 강화, 기체 설계 안전성 확보 논의에 불을 지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고는 더 안전한 하늘을 향한 길을 여는 데 기여한 셈이다. 하지만 사고 발생 7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2025년 기준), 미시간 호수는 그날 밤의 진실을 품은 채 깊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유족과 연구자들의 간절한 물음에도 미시간 호수는 여전히 답이 없다.


 

(1부)사라진 비행기들: 끝내 돌아오지 못한 6편의 항공기 실종 기록

(2부)사라진 비행기들: 끝내 돌아오지 못한 6편의 항공기 실종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