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줄리 도비니는 1673년경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아버지 가스통 도비니는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의 왕실 마굿간 책임자였던 아르마냑 백작 루이 드 로렌의 비서로 일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아버지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는데, 당시엔 드물게 소녀임에도 불구하고 남자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정규 학문 수업을 들었고, 아버지 밑에서 훈련 받던 소년 무관들 함께 검술 연습까지 했다. 줄리는 남장을 하고 병사들 사이에 섞여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검술에 재능을 보였고, 12세 무렵엔 성인 남성에게도 뒤지지 않는 솜씨를 갖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몸놀림은 바람처럼 빠르고, 공격은 무서울 만큼 정확했다. 여성의 행동과 삶을 엄격히 억제하던 시대에, 그녀는 날카로운 칼끝으로 자신만의 길을 당당히 개척해 나갔다. 당시 프랑스 사회에서 여성이 검을 다루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금기였다. 귀족 여성이라 해도 기껏해야 기본적인 호신술을 익히는 수준이 전부였다. 어쩌면 그녀에게 검술은 단순한 기술 이상의 의미, 억압된 시대를 향한 저항이자 타고난 본능의 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독특한 유년기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의 서막에 불과했다. 왕궁 마당에서 다져진 검술은 곧 그녀를 더 넓고 위험한 세상으로 이끌었다.
*다음 문단부터는 편의상, 줄리 도비니를 그녀의 가장 널리 알려진 별칭인 ‘라 모팽’으로 표기한다.
첫번째 혼인 그리고 가출
그녀의 미모와 재능은 일찍이 상류층의 눈에 띄었다. 14세가 되었을 때 줄리는 아버지가 모시던 사람의 애인이 되었는데,그가 바로 아르마냑 백작 루이 드 로렌이었다. 백작은 어린 그녀를 가까이 두고자 곧바로 결혼을 주선했다. 1687년, 줄리는 생제르맹 옹레 근교에 사는 모팽이라는 성의 귀족과 결혼하여 표면상으로는 “모팽 부인(Madame de Maupin)”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사실상 아르마냑 백작이 라 모팽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기 위한 계략이었다. 남편은 결혼 직후 남쪽 지방으로 전출되었고, 라 모팽은 아르마냑 백작의 곁에 남겨졌다. 백작의 애인으로서의 안정된 생활은 그녀에게 맞지 않았다. 그 생활에 싫증이 난 그녀는 곧 집을 나와 새로운 모험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집을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라 모팽은 펜싱 교관이였던 세랑네스(Henri Sérannes)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두 사람은 함께 도망치듯 파리를 떠났다. 때마침 세랑네스가 불법 결투 중 사람을 죽여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었기에 둘의 도주는 더욱 급했다. 라 모팽과 세랑네스는 프랑스 시골을 떠돌며 검술 시범을 보이거나 선술집에서 노래를 불러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 라 모팽은 남성 복장을 하고 다녔지만, 굳이 자신을 남자로 속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흥행을 위해 “사실 여자 검객”이라고 광고하며 일부러 남장한 채 무대에 오르기도 했는데, 한 번은 그녀의 성별을 믿지 못한 구경꾼이 시비를 걸자 라 모팽은 가슴을 드러내 보이며 여자인 것을 증명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결투 도중 상대가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은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이러한 "충격적인 반전"은 라 모팽의 이름을 그녀가 거쳐가는 지방 도시마다 우후죽순 퍼트리는데 데 일조했고, 그녀의 대담한 행적은 점차 프랑스 전역에 걸쳐 소문으로 떠돌았다.
수녀원 사건과 화형 선고
얼마 뒤 라 모팽은 남편도, 연인 세랑네스도 아닌 또 다른 사랑에 빠졌는데 상대는 다름 아닌 한 젊은 여성이다.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은 당시 사회의 금기를 깨는 것이었다. 결국 상대 여성의 집안에서는 딸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버렸고 라 모팽은 연인을 되찾기 위해, 그녀가 감금된 수녀원에 수련 수녀로 위장 입회했다. 여기서 벌어진 파격적인 사건이 바로 그녀를 악명높은 전설의 주인공으로 만든 “수녀원 탈출 사건”이다.
라 모팽과 연인은 1687년 아비뇽 근교의 한 수녀원(전해지는 바로는 비지탕딘 수녀회)에 함께 머물며 탈출을 모의했다. 둘의 계획은 기상천외했다. 마침 수녀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한 수녀의 시신을 몰래 가져와 연인의 침대에 눕혀 두고 방에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불길이 치솟는 혼란 속에서 라 모팽과 연인은 탈출에 성공했다. 불탄 방에서는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으므로, 사람들은 당연히 라 모팽의 연인이 화재로 사망한 것으로 믿게 되었다. 이 대담무쌍한 위장은 잠시 효과가 있었고, 두 사람은 약 3개월간 자유를 만끽하며 함께 도피 생활을 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결국 거짓은 탄로 났다. 불타 죽은 시신이 애초에 다른 수녀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연인은 그녀의 가정으로 돌려 보내졌고, 라 모팽은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프랑스 당국은 이 사건에 경악했다. 17세 소녀의 소행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범죄였기에, 법정은 그녀를 남성으로 간주해 재판을 진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라 모팽은 궐석재판에서 유괴, 시신 훼손, 방화 및 법정 불출두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고, 산 채로 불태워 죽이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말 그대로 화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 정작 그녀는 재판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라 모팽은 이미 법의 손아귀를 벗어나 있었고, 그 누구도 그녀를 잡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1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사형수가 되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다른 활로를 찾아 나섰다. 현상수배 상태로 프랑스 남부를 떠돌던 라 모팽은 탈출 이후 한때 함께했던 연인과도 결국 헤어졌다. 그리고는 운명을 바꾸듯 다시 무대에 도전하기로 마음먹는다. 방랑 중에도 여관에서 노래를 부르며 지냈던 그녀는 자신이 노래와 연기로도 승부할 수 있음을 깨닫고, 파리로 올라가 정식 오페라 무용단에 입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성공과 첫 번째 사면
모팽은 파리에 도착해 오페라 극장의 문을 두드렸다. 문제는 그녀에게 내려진 화형 선고였다. 당시 왕립 오페라단에 합류하려면 신원 조회를 통과해야 했기에, 중범죄자 신분으로는 불가능했다. 결국 배후에 있던 옛 연인 아르마냑 백작 등 유력인물들이 나서서 국왕에게 청원을 올렸다. 루이 14세는 이 기묘한 여성을 눈여겨보고 관대히 용서하기로 했다. 젊고 재능 있는 가수를 무대에 세우는 편이 실보다 득이 크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라 모팽은 국왕의 특별사면을 받아 과거 죄를 면했고, 당당히 무대에 설 기회를 얻었다.
1689년경 라 모팽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입단 시험을 거쳐, 1690년 17세의 나이에 정식 단원으로 데뷔했다. 처음 오페라단 측에서는 그녀의 범죄 경력을 꺼려 입단을 거부했지만, 유력 가수들의 추천과 후원이 더해져 결국 그녀를 받아들였다. 같은 해 라 모팽은 장바티스트 륄리의 오페라 카드무스와 에르미온(Cadmus et Hermione)에서 그리스 여신 팔라스 아테나 역으로 첫 무대에 올라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1690년대 내내 그녀는 파리 오페라의 주요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며 승승장구했다. 원래 높은 소프라노 음역으로 시작했으나 차츰 자신의 자연스러운 음역인 콘트랄토(메조소프라노급)로 영역을 넓혔고, 남장 여자 역할(브리처 역할)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1701년 트리아농 궁전 공연을 지켜본 당대 인사 당죠 후작은 “그녀의 목소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라고 칭찬했을 정도로, 라 모팽의 가창력은 뛰어났다. 그녀는 프랑스 최고 작곡가들의 신작에 잇따라 캐스팅되었고, 1690년부터 1705년까지 20편이 넘는 오페라에서 40여 개의 배역을 소화하며 파리 사교계의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무대위에서 뿐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라 모팽은 끊임없이 화제를 몰고 다녔다. 그녀는 무대 밖에서도 남성 복장을 즐겨 입고 활보했으며,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사랑을 쟁취했다. 파격적인 행실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재능과 인기는 워낙 대단했기에 궁정과 사회는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였다. 심지어 왕족과 귀족들 앞에서 여장을 한 남성 가수와 듀엣을 부르는 익살스런 공연을 펼치거나, 베르사유 궁전 연회에서 노래해 왕을 즐겁게 하는 등, 라 모팽은 기행과 예술성을 동시에 보여주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불 같은 성격은 곧 또 다른 사고를 치고 만다.
“가면무도회, 그리고 세 남자를 쓰러뜨리다”
라 모팽의 명성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1695년경 파리 왕궁에서 열린 가면무도회 이야기다. 화 려한 드레스 차림의 라 모팽은 한 젊은 귀부인과 춤을 추다가 충동적으로 무도회장 한복판에서 그 여성에게 키스를 했다. 주변이 술렁였고, 특히 그 부인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세 명의 남성 귀족들이 분개했다. 모욕감을 느낀 그들은 즉각 라 모팽을 결투장으로 불러냈다. 3 대 1의 결투가 성사되었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라 모팽의 완승이었다. 그녀는 빼어난 검술로 연이어 세 남자를 모두 제압했고, 각각 경상을 입힌 채 당당히 무도회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차례로 쓰러지자 장내는 일순 아연해졌다.
이날 사건은 통쾌함과 파문을 동시에 남겼다. 라 모팽의 연승은 자신의 흑기사 노릇을 자처한 남성들을 무색하게 하며 통념을 깨부쉈지만, 동시에 불법 결투를 공개 연회 석상에서 벌였다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원래 루이 14세는 엄격하게 결투를 금지하고 있었고, 특히 무도회는 왕족도 참석하는 공식 행사였다. 감히 그 자리에서 결투 소동을 벌인 것은 왕을 법적으로, 체면상으로 모두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자기 사람들을 베어버린 여검객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세 남성의 가족은 당국에 강력히 처벌을 요구했다. 결국 라 모팽은 서둘러 파리를 빠져나가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그랬듯 그녀는 또다시 법의 추적을 받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이 무렵 라 모팽은 국외로 떠돌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잠시 브뤼셀에 머물며 당시 그곳 총독이던 바이에른 공작(선제후)의 연인이 되기도 했는데, 머지않아 그녀의 거침없는 성격에 질린 공작이 관계를 정리하자 화가 난 그녀가 이별의 선물로 그가 준 보석을 집어 던졌다는 일화도 있다.
파란만장한 행보는 계속되었지만, 정작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다시 무대에 서고픈 열망이 식지 않았다. 몇 년의 방랑 끝에 라 모팽은 파리로 돌아갈 기회를 엿보았고, 마침내 왕실의 중재로 두 번째 사면이 이루어졌다. 1698년 루이 14세의 동생인 필리프 1세(오를레앙 공)등의 도움으로 그녀는 모든 처벌을 면하고 프랑스로 귀환할 수 있었다. 화제가 되었던 결투 소동은 왕의 관용으로 일단락되었고, 라 모팽은 다시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운 영혼”

라 모팽을 둘러싼 사랑 이야기와 결투담은 이처럼 한편의 모험소설 같은 그녀의 삶을 배경으로 수없이 쏟아졌다. 그 중 일부는 사실로 확인되지만, 일부는 과장된 전설로 남아 있다. 그녀 자신이 워낙 튀는 삶을 살았고 공식 기록이 부족한 탓에, 동시대에 떠돌던 소문과 후대의 상상력이 뒤섞여 진실과 허구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예컨대 그녀가 결투로 쓰러뜨린 남성이 10명이 넘는다거나, 가는 곳마다 남녀를 불문하고 애인을 두었다는 식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실제로 라 모팽은 결투에서 좀처럼 패한 적이 없었고, 상대가 누구든 거리낌 없이 승부를 겨뤘다는 기록이 있다. 오페라 극장의 동료 남성 가수 루이 뒤메니가 공연 중 다른 여성 단원을 모욕했을 때, 그녀가 그를 구타하여 혼쭐 냈다는 구체적인 일화도 전해진다. 결투로 알게 된 남작 데알베르와 연인으로 발전한 사례처럼, 싸움조차 하나의 인연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 그녀의 연애 편력 역시 유명무실한 남편을 제외하고도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다양했다. 아르마냑 백작처럼 권력자 후견인과 맺은 관계에서부터, 세랑네스나 데알베르처럼 칼을 통해 맺은 인연, 아비뇽의 수녀처럼 사회 규범에 도전한 사랑, 그리고 오페라 무대 위아래에서 스쳐간 수많은 연인들이 있었다. 심지어 동료 여가수에게 집착해 극단적인 행동을 보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반대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구애자를 총으로 위협하며 쫓아냈다는 등의 소문도 있었다. 다만 이러한 파격 스캔들들은 풍문으로 떠돈 것들도 많아, 정확한 경위나 결과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전해진다. 분명한 것은 라 모팽이 자신의 인생을 통해 17세기 사회의 성(性)과 관습의 한계를 깨뜨렸다는 점이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당대에는 살아있는 전설이었고, 이후 후대의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이 매력적인 악동을 모델로 숱한 창작물을 남겼다. 라 모팽의 삶은 동명 소설의 주인공에 영감을 주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뮤지컬, 발레 등에서 재현되며 신화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만큼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인물로서, 우리는 출처가 분명한 사실과 입소문에 불과한 이야기를 구분해 볼 필요가 있다.
“갑작스러운 은둔과 마지막”
1700년대에 접어들며 라 모팽의 폭풍 같은 삶에도 서서히 정착의 순간이 찾아왔다. 수많은 연애에도 좀처럼 마음 붙이지 않던 그녀가 1703년 마침내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평을 듣던 귀부인 마르키즈 드 플로랑작(Marquise de Florensac)을 만나 깊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두 사람은 약 2년간 남의 시선을 피해 함께 지냈고, 라 모팽은 상대를 통해 처음으로 안정된 사랑을 맛보았다. 그러나 1705년 플로랑작 부인이 갑작스런 열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의 행복도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 속에서 라 모팽은 더 이상 무대에 설 수 없었다. 그는 오페라단을 은퇴하고 세상의 소란에서 한걸음 물러나, 다시 한번 수녀원으로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 탈출했던 그 수녀원에서, 이번에는 스스로 은둔처를 찾은 것이다.
1707년, 라 모팽은 생을 마감했다. 향년 33세로 비교적 이른 죽음이었다. 그녀의 최후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공식 기록이 거의 없다. 일설에는 남편과 극적으로 재회했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다른 기록에서는 그녀가 말년에 신에게 용서를 구하며 회개했다고도 전한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한때 프랑스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그녀의 마지막 길은 놀랍도록 조용하고 평온했다는 사실이다. 화려했던 오페라 가수의 죽음은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녀의 장례식조차 소박하게 치러져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갔다고 한다. 온갖 파란을 겪었던 삶의 막이 그렇게 평온히 내린 것이다.
에필로그: 전설로 남은 여성, 라 모팽

죽음 이후 한동안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라 모팽은 19세기에 들어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출판되면서 다시금 주목받았다. 1835년 테오필 고티에의 마드모아젤 드 모팽은 실제 그녀의 행적을 모티브로 한 소설로, 남장과 양성애적 사랑 등의 파격적 요소를 문학적으로 풀어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대에 와서는 그녀가 양성애자 혹은 성소수자의 역사적 아이콘으로 재조명되기도 한다. 그러나 픽션을 제외하고도 라 모팽 자신의 생애담은 이미 소설보다 극적이었다. 불 같은 성격과 탁월한 재능으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었던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살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녀의 삶은 시대를 초월하여, 정해진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영혼들에게 강렬한 영감이 되고 있다.
(1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미야모토 무사시
(2부)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도널드 맥베인
(3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척준경
(4부)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슈발리에
(완) 역사상 가장 치열하게 검을 휘둘렀던 전설의 검객들 - 줄리 도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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